매일신문

"'빨갱이' 낙인…위령비 세워 원혼 달래야죠"

서석태 포항보도연맹 유족회장…대법원, 집단 살해 국가책임 인정

서석태 포항보도연맹유족회 회장이 대법원의 판결과 관련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대호 기자
서석태 포항보도연맹유족회 회장이 대법원의 판결과 관련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대호 기자

"1950년 8월 9일 오후 늦게 구룡포항에는 많은 사람이 동해 먼바다를 바라보며 서성거렸습니다. 이른바 보도연맹 예비 검속자 50여 명을 태우고 오전 구룡포항을 떠난 포경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막상 돌아온 배에 그들이 없자 모두가 수장된 것을 직감했죠. 어디 물어볼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죠. 그날 구룡포에서 대보(지금의 호미곶)까지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지난달 13일 대법원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200여 명이 집단 살해된 1950년의 '포항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자식조차 없이 동해 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된 형님 규성 씨의 65년 한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자 소송에 참여했던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포항보도연맹 유족회' 서석태(72'포항시 북구)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저는 7세 철부지였습니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던 1950년 8월 초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대보초등학교로 보리밥 도시락을 싸들고 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형님이 남기신 밥을 내가 먹겠다고 떼를 쓰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뒤에서야 형님은 농사일을 하다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끌려 그곳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에 정부는 좌익 세력들을 전향시킨다며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 같은 비극을 낳을지는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단체의 명단에 오른 사람들, 특히 농어촌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냥 우익단체나 경찰 등이 머릿수 맞추기로 권유해 반강제로 가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동네는 현재 호미곶면 강사 2리입니다. 그 깡촌에 무슨 이념이며 좌익이 있었겠습니까. 진짜배기 좌익들은 보도연맹을 만들 당시 이미 숨어버린 이후였습니다. 철이 들어 부모님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보도연맹 가입을 꺼리면 '나랏일에 어깃장 놓는다'며 더 나쁜 놈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은 이른바 '빨갱이'로 낙인찍혀 버렸다. 가족들도 유무형의 각종 차별과 냉대 그리고 자괴감에 힘들어했다. 서 회장도 겨우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연좌제가 그를 괴롭혔고 부모님은 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형님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부질없는 한 가닥 희망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 일 있고서 한참을 부모님은 바람 부는 날이면 해변가를 서성였습니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며 밥 한 공기를 늘 함께 차려놓으셨습니다."

그렇게 55년 세월이 흐르고서야 형님의 억울함을 풀어줄 기회가 찾아왔다. 노무현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고 2009년 한국전쟁 당시의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서가 유족들의 손에 들어왔다. 국가가 책임을 부인했지만 수년간의 소송 끝에 대법원이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이 있고 나서 정부 지원금을 합해 2010년 첫 위령제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마저도 끊긴 상태입니다. 하지만 유족들과 뜻을 모아 고향에 위령비를 건립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이 제 여생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대법원의 포항보도연맹사건 판결이 알려지고 나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을 받지 못했던 일부 유족들도 포항의 유중근 변호사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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