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수성못 이야기

대학시절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옛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랫말이 젊은 청춘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들려서인지 한때 춘천 여행은 젊은이들의 버킷리스트의 하나였다. 그러나 소심하고 추진력이 부족했던 나는 경춘선을 타고 호반의 도시 춘천을 여행하는 대신 친구들과 집 근처 수성못을 배회하며 호반의 정취를 즐기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수성못 근처에 가면 학창시절의 추억과 옛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저절로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수성못은 나에게는 좀 더 새로운 의미와 인연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아니, 장소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엔 뻔질나게 돌아다니던 산책코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못의 유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별반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5, 6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난해한 일본어로 기록된 독도 관련 문헌 연구 스터디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일본분이 계시는데 그분을 통해 뜻밖의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수성못을 만든 사람이 '미즈사키 린타로'라는 일본인이라는 얘기였다. 처음엔 귀를 의심할 만큼 놀랐지만, 자료를 받아 읽으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수성못에 얽힌 사연 때문이라기보다는 지역사에 대한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외지인에게 그것을 들켜버린 낭패감 같은 것이었다. 아마 내가 대구의 근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의 그 복잡한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성못은 1915년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이주해온 미즈사키 린타로가 가뭄과 홍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관개용수를 조달하려고 동분서주하며 수리조합을 만들고 자금을 조달하여 1927년에 완공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라 일본인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일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지만, 그는 대구로 이주해 오기 이전부터 자신의 사재를 털어 출신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사회 공헌에 힘써온 인물이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 수성못에 대한 애착이 커 생전에는 늘 "내가 죽으면 장례는 전통 조선식으로 하고,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당부를 했다 한다. 1939년 12월 그가 세상을 뜨자 유언대로 수성못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혔고 그와 오랜 시간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던 서수인이라는 분의 자손이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아직도 그의 무덤을 보살피고 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런 사연 덕분인지 최근 들어 수성못은 한'일 우호를 상징하는 곳으로서 다양한 교류행사가 열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친선교류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요즘, 문득 오리배 선착장에서 가까운 법이산 숲길 한쪽에 고이 잠들어 있는 미즈사키 린타로의 생애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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