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탓에 수십m 앞도 보이지 않는다. 가는 비마저 흩뿌린다. 백두산 천지(天池)를 보기 위해 10인승 차량을 타고 북파(北坡'백두산 북쪽 비탈) 코스로 올라온 길. 걸어서 천문봉으로 향하는 동안 천지를 보지 못하리란 불안감이 엄습한다. 일순간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바람에 쫓겨 구름이 저 멀리 달아난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10분이란 짧은 시간에 천지를 가렸던 구름이 모두 사라진다.
웅장하고 신령한 기운이 가득한 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날 서파에서 구름 때문에 천지를 보지 못한 까닭에 눈앞에 펼쳐진 천지는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리도록 푸른 천지에 햇빛이 투영돼 물빛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천지를 호위하듯 둘러선 백두산 영봉들은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이 감격은 어느 곳에서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백두산 천지는 한민족의 시원(始原)이 분명하다.
백두산 천지에 오른 것은 지난 8월 21일. 북한군이 서부전선에서 우리 군을 향해 포격도발을 하고, 이에 우리 군이 북한 포탄 발사지점을 향해 수십 발의 포탄을 대응 사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남과 북이 대치하며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점에서 천지를 만난 감회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곧 한민족이 끝장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득한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백두산에 신시(神市)를 건설하는 것을 지켜봤을 백두산을 지키는 그 어떤 존재에게 전쟁의 광풍이 한반도를 할퀴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한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답사하며 한민족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산 가운데로 북한'중국 국경이 지나는 게 백두산이다. 중국 사람들이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부르는 백두산을 중국 정부가 10대 명산의 하나로 꼽은 이후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7, 8월 성수기 백두산을 찾는 사람은 하루 1만5천~2만 명, 많을 때엔 3만 명이나 된다. 이 중 80% 이상이 중국인이다.
지린성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백두산 중국 쪽 지역을 찾은 관광객 수는 80만 명, 관광 수입은 7억4천만위안(약 1천362억원)에 이른다. 수년 전까지는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지린성 정부가 관광 수입을 가져갔으나 지금은 전액이 베이징 중앙정부에 귀속된다고 한다. 한국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이 고스란히 중국 정부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 백두산을 찾은 우리 관광객이 낸 돈이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산 백두산을 두고 불경(不敬)한 얘기지만 백두산의 '활용'이란 면에서 보면 중국이 거의 모든 이익을 챙기는 상황이다. 중국이 백두산 서파 정상 일부를 북한으로부터 장기 임차해 한국 관광객들이 밟아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을 보니 중국의 장삿속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북한 백두산 삼지연까지 KTX를 놓으면 4, 5시간 안에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 남의 나라 중국 땅을 밟으며 백두산을 찾지 않아도 되고, 우리 관광객들이 쓰는 돈이 북한 경제를 살리고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다. 백두산 관광이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고, 나아가 통일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남북 정상이 북한 쪽 백두산에서 만나 회담을 하는 것도 추진할 만하다. 지금까지 두 번의 정상회담은 모두 평양에서 이뤄졌다. 한라산'서울에서 회담을 하는 것도 좋지만 북한에서 회담이 열린다면 그 장소로 백두산을 추천하고 싶다. 한민족 출발점인 백두산에서 두 정상이 회담한다면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공감이 더 잘 이뤄지리란 생각에서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에 영향을 행사하는 강대국들이 남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게 확실하다. 남북통일 문제가 글로벌 이슈가 되면서 통일 추진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남북 정상이 같이 백두산을 거닐며 한민족 미래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눌 그날이 오기를 백두산 천지에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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