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방영된 KBS TV 드라마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젊은이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대다수 젊은 세대가 임진왜란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이순신이었지만 이순신을 발탁한 이가 서애 선생이었고, 처절했던 왜란의 와중에서 나라를 구한 구심점이 바로 서애 선생이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서애 류성룡 선생을 비롯해 야은 길재, 학봉 김성일 등 경북의 혼과 정신을 대표하는 대학자 3인을 조명하자는 운동이 주목받고 있다. 이 운동의 한가운데에 노진환(71) 영남유교문화진흥원장이 있다.
그는 2012년 각계를 망라하는 34명의 인사를 모아 '야은 길재'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까지 꾸렸다. '야은 역사체험관'은 올 연말 공사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등 기념관 건립 추진 작업이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다. 그는 왜 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던 그를 설득해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사업을 하는 경제인으로 오래 활동했는데 왜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주목하는가?
▶30년쯤 전이다. 내가 40대 초반쯤이었다. 한 사회단체의 경북 회장을 맡으면서 어느 모임에 갔었는데 한 기관장이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었고,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지금의 구미)에 있다"는 얘기를 했다. 무심코 흘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 경북이 정말 대단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우리 경북의 역사적 전통을 증명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문헌도 없었다. 부끄럽지만 그런 기록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런 기록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실 역사에 관심이 적다. 그들에게 지금 이런 작업들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역사를 주목하는 것은 뿌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뿌리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사업을 했지만 어떤 영역에서든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뿌리는 정신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바른 정신만 있다면 올바른 인성을 갖게 되고 어떤 위치에 있든 제대로 된 행동을 하게 된다.
-야은'서애'학봉 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야은 길재부터 설명해달라.
▶야은 길재는 공부의 뿌리다. 조선을 지탱해온 학문의 뿌리가 야은 길재다. 일반인들이 잘 아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의 학문 뿌리가 바로 야은 길재다. 일반인들이 유학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다. 야은 길재는 고려 말'조선 초 학자였는데 그 당시 양반의 자제들뿐만 아니라 천민의 자제들까지 가르쳤다. 반상의 구분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상을 파괴하면서까지 학문을 전파하는 데 애썼다. 학문과 인격을 모두 갖춘 학자가 바로 야은 선생이다. 오늘의 지식인들은 야은의 행보를 생각해봐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드라마 징비록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서애 선생의 위상은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 같다.
▶'서애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 과연 존재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만큼 그의 공적이 크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가장 큰 동력이 서애 선생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많이 언급하지만, 그분들을 키우고 천거한 것이 서애 선생이었다. 정읍현감이던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해 해상을 장악하게 만든 이가 바로 서애 선생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문약(文弱)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많이 받는데 서애 선생은 유학자였지만 주자성리학의 관념론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의학과 군사분야에 대한 저술까지 남겼다. 당시 산업의 근간인 농업진흥을 위한 다양한 제안도 내놨다. 상업에 대한 개념도 희미했던 시절, 상업에 대한 권장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주장까지 했다. 1593년 국경지대인 중강진에 무역거래소를 공식 설치하도록 한 것도 서애 선생이었다.
-학봉 선생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너무 모르는 것 아닌가?
▶일본에 통신 부사로 갔다가 돌아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조선 조정에 했다고 해서 학봉 선생에 대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시각은 너무 일면만 보는 것이다.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은 모두의 귀감이 됐고 훗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우리 경북의 혼으로 이어졌다. 임란 때 모두가 도망가기 바빴지만 학봉 선생은 용감히 나가 왜적을 쳤고,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학봉 선생의 아들도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큰 학문적 성과를 남긴 유학자였지만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직접 칼을 빼들고 전장에 나선 위대한 지도자였다.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해왔는데 왜 기념관을 지어야 하나?
▶훌륭한 역사 교육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지역이 낳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인데 늦은 감이 있다. 관광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것이다. 일본은 서애 류성룡 선생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그 때문에 일본은 기본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명나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임진왜란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우리 지역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경북의 혼'을 상징하는 유학자들을 조명하는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셨다.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손을 휘저으며) 사실 말도 못하게 고생을 했다. 사실 후손들도 그리 반기지 않는다. 기념관을 만들려고 해도 기념관이 만들어질 경우,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후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그분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그 때문에 한 분, 한 분 만나서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들었다. 기념관 추진위원회도 34명이나 모으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지역사회에서 이름난 분들인데 모시기가 그리 쉬운 것인가? 다행스러운 것은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역사에 대한 생각이 깊다. 그래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나마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하면 주변 경제인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는가?
▶"그거 뭐 하러 해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삼성을 보라. 돌아가신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이 문화와 관련된 분야에서 엄청난 사회공헌을 했다. 이런 일을 하니까 기업이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이다. 경제인들도 돈만 벌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에 기여를 해야 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 다 뺏어간다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경제인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는 노력에 일조해야 한다.
-여러 가지 보람도 있었을 텐데.
▶어느덧 우리 경북의 자랑이 된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설립에 산파 역할을 내가 했다. 지방정부의 힘만으로는 설립이 어려워 중앙정부의 결단을 이끌어내야 했었다. 당시 민간인 신분이지만 정책 결정자들을 많게는 수십 차례 만나 설득도 하고 읍소도 했다. 우리 지역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한국국학진흥원이 자리를 잡았다. 전통문화유산의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조사'연구와 함께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교육과 보급을 하며 전국적 위상을 확보했다. 안동의 가치가 올라갔고 경북의 위상이 상승했다. 아쉬운 점은 우리 문화의 상징이란 점에서 한옥으로 지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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