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임오년에 일어난 임오화변은 조선왕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숨졌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야기.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영조가 영화의 대사에서도 말하듯이 "이건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어느 가정 내에서나 있을 법한 불화하는 아버지와 아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왕이라면 이것은 역사적인 비극이 된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송강호)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유아인)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영조는 차차 실망하게 된다. 세자 사도는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이었지만, 학문을 중시하는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녔다.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영화는 미스터리 구조를 취한다. 뒤주에 갇힌 8일간의 현재 시간 사이사이에, 사랑받는 세자에서 왕의 미움을 받는 아들로 성장하기까지의 30여 년간 펼쳐진 과거의 사건들이 인서트된다. 그리하여 왜 왕이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음으로 이르게 했는지의 원인이 추적 구조 안에서 퍼즐을 맞추어 나가게 한다.
조선의 번성기를 이끈 영'정조의 업적을 기리는 교훈적인 사극영화가 아니다. 어쩌면 추석 시즌에 전 가족이 보기에 난감한 영화일 수도 있다. 반항하는 아들과 억누르는 아버지의 불꽃 튀기는 갈등은 무시무시하다.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두 남자의 충돌, 아버지와 아들의 힘겨루기, 복잡한 권력 구조 한복판에서 벌이는 왕과 왕자의 대결을 중심에 놓는 미스터리 드라마의 선택은 역사를 박제화된 것이 아니라 다이내믹한 현재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박진감 넘치는 서사구조로 인해 이 사극영화는 한층 세련된 장르적 진화를 보여준다.
이준익, 송강호, 유아인, 세 남자의 역량이 총집결되었다. 세 사람 모두 천만 영화의 주역들이다. '왕의 남자'(2005)의 감독인 이준익, '변호인'(2013)의 송강호, '베테랑'(2015)의 유아인이 뭉쳐서 또 하나의 천만 영화 탄생에 대한 기대를 벌써부터 이야기한다. 하지만 천만 관객 영화의 필수 요소인 웃음과 감동을 이 영화에서 기대하지는 말 것이다. 비극 서사에 웃음이 들어갈 자리는 없고, 가족의 소중함을 교훈적으로 설파하는 감동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진짜 감정이 놓인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끝내 마음의 병을 얻고 미쳐가는 아들, 그의 자결을 명하였다가 당쟁으로 인한 신하들과의 정치 투쟁 때문에 세자를 아사시켜버려야 했던 왕, 세손을 살리기 위해 세자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던 왕실 여인들의 당시 상황이 밀도 있게 전개되어, 영화는 현실에서 역사와 대면하는 순간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송강호가 왜 대배우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사도의 목숨이 끊어진 후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알아듣기 힘든 어조로 왕이 슬픔을 표하는 장면에서 송강호는 인간인 왕의 모습과 동시에 자식 가진 아버지의 힘겨움을 온몸으로 전달한다. '베테랑'의 성공적인 연기 흐름을 이어받아 순수한 열정에서 좌절, 광기로 이어지는 복잡한 표정 변화를 보여주는 유아인은 앞으로의 활약이 가장 기대되는 20대 남자 배우임에 분명하다. 에필로그에서 장성한 정조로 분한 소지섭의 깜짝 출연은 영화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남자들의 서사이지만 왕실 여성들이 소모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장점이다. 인원왕후 역에 김해숙, 영빈 역에 전혜진, 혜경궁 홍씨 역에 문근영, 화완옹주 역에 진지희, 정순왕후 역에 서예지, 무수리에서 후궁이 된 문소원 역에 박소담 등, 왕후에서 무수리까지 왕실의 여성들 모두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위해 애쓴다.
슬프고도 장엄한 휴먼 드라마인 '사도'는 2016년도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한국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 인류 보편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 관계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숙종에서 영'정조 시대로 이어지는, 피를 부른 조선 당쟁의 흐름을 미리 알고 가면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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