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년 달성 스토리로드] ②논공읍…"원님, 은거울 팔아 갈실마을 큰 못 파 주십시오\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 은거울을 팔아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가뭄을 피하게 했다는 함안 조씨 가문. 이 가문의 며느리 상(像)인 부덕불 앞에서 마을의 한 할머니가 치성을 드리고 있다.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 은거울을 팔아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가뭄을 피하게 했다는 함안 조씨 가문. 이 가문의 며느리 상(像)인 부덕불 앞에서 마을의 한 할머니가 치성을 드리고 있다.
달성군 청사의 주산인 금계산. 풍수지리상
달성군 청사의 주산인 금계산. 풍수지리상 '금계포란형'인 금계산 자락에 들어선 군 청사는 금닭처럼 대대손손 풍요를 안겨주는 길지라고 알려져 있다.
달성군 논공읍 노이리에 함안 조씨 가문의 며느리가 팠다는 노홍지.
달성군 논공읍 노이리에 함안 조씨 가문의 며느리가 팠다는 노홍지.

논공읍(論工邑). 지명을 한자로 풀이하면 논할 론(論)에 공업을 뜻하는 장인 공(工)이다. 이곳에는 이미 30여 년 전인 1983년에 410만㎡ 규모의 달성산업단지가 들어서 대구경제 발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말 그대로 이름값을 한 셈이 됐다.

달성군 남서쪽에 위치한 논공읍은 낙동강을 경계로 이웃 지방자치단체인 고령군으로 나뉘고, 옥포'유가'현풍면과 이웃한다. 2005년 달성군의 청사가 남구 대명동에서 이곳 논공읍 금포리로 옮겨와 명실상부한 군청 소재지로서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논공읍은 노이(蘆耳)'금포(金圃)'삼리(三狸)'위천(渭川)'상(上)'하(下)'남(南)'북(北)'본리(本里) 리 등 9개 법정리에 26개 행정리로 이뤄져 있다.

◆갈실마을 저수지의 부덕불(婦德佛)

논공읍 노이리의 노홍지(蘆鴻池) 입수지점 길가에 얼핏 돌부처를 닮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으로 바위를 쪼아 만든 여인네 모습을 한 석상(石像)이 서 있다. 이곳 동네 사람들은 '부덕불'이라고 부른다. 석상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불(佛)' 자를 넣어 그 지위를 부처와 동격 시 할 정도로 애지중지 모시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논공읍 갈실마을(노이리)에 함안 조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집안의 한 며느리는 용모도 아주 준수하고 양반 규수의 행실로 집안에서는 며느리를 잘 들였다는 자랑을 내놓고 할 정도였다.

조씨 가문의 며느리는 시부모 봉양과 남편을 위해 성심을 다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돌림병이 전국으로 퍼졌고, 결국 이 마을까지 번진 돌림병 때문에 시부모는 물론 남편까지 모두 잃게 된다.

원래 친정이 부유한 가정이라 시집올 때 많은 보물과 재산을 가져온 덕에 시부모와 남편이 저세상으로 갔지만 살아가는 데는 별 걱정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식도 없고 해서 늘 한숨 섞인 세월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인가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어 논밭의 곡식이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무심한 하늘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가뭄에 지쳐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하늘만 원망할 뿐 아무런 방책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조씨 가문의 며느리는 집안 장롱 속 깊은 곳에 파묻어 놓은 각종 패물 중 가장 값이 나가는 은거울을 들고 고을의 원님을 찾아간다. 며느리는 원님에게 "이 은거울을 팔아 갈실마을에 큰 못을 파 주십시오"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감동한 원님은 며느리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원님의 명령으로 인부들이 동원돼 못을 파는 중에 중간지점에서 집채만 한 바위가 버티는 바람에 작업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 마을의 인부들까지 동원돼 작업에 나선결과 천신만고 끝에 그 바위를 들어낼 수 있었다.

'영차! 영차!'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커다란 돌이 움직이기 시작할 쯤에 하늘에서는 여기저기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돌이 못 밖으로 옮겨지자 하늘을 때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기둥만 한 물줄기의 비가 쏟아져 며칠 만에 이 못에는 물이 가득 차게 된다.

◆다시 태어난 부덕불

동네 사람들은 조씨 가문 며느리의 착한 심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비가 내렸다며 좋아하고 동네잔치를 벌이는 도중에 갑자기 며느리가 숨을 거두었다는 뜻밖의 비보를 접하게 된다. 며느리 역시 이 같은 기적에 너무 기뻐하다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갈실마을 들에는 이때부터 웬만한 가뭄은 타지 않을 정도로 거의 해마다 풍년농사를 짓게 됐는데 주민들은 갈실못의 물을 빼낼 때 마다 반드시 조씨 가문의 며느리에게 제사를 드리는 등 각별한 예를 갖췄다. 제사를 올리지 않고 물을 뺄 때는 구렁이들이 못의 수문을 막아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동네 사람들은 감사의 뜻으로 못에서 파낸 바위로 조씨 가문 며느리의 모습을 새긴 미륵불을 만들어 못 옆에 세우고 부덕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부덕(婦德)은 부녀자의 아름다운 덕행을 두고 말한다. 유학에서는 온화'양순'공손'검소'겸양을 부녀자의 오덕(五德)이라고도 한다.

안타깝게도 높이 97㎝, 둘레 66㎝, 얼굴길이 34㎝, 얼굴둘레 25.5㎝로 만들어진 부덕불이 1998년 5월 26일 문화재 절도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도난사고를 당하고 만다.

달성군은 부덕불의 주인공인 논공읍 갈실마을 함안 조씨 가문의 며느리를 지난해 군 개청 100주년을 맞아 달성을 빛낸 역사적 인물 2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고 지난 3월 3일 부덕불의 석상을 새로 제작해 제막식을 가졌다.

부덕불의 새 석상은 경북대 출신인 오채현(경기도 파주) 조각가에 의뢰, 문중 자문과 자료검토 등 고증을 거쳐 현 위치인 노홍지 상류 삼거리에 화강석으로 원형의 130% 크기로 복원했다.

◆약산마을 상사여인(相思女人)의 원한

예부터 약초가 많이 난다고 해서 약산마을에는 군위 방씨들이 처음으로 세거를 이뤘고, 뒤이어 수원 백씨와 파평 윤씨들이 들어오게 됐다.

어느 때인가 윤씨 가문에서 3대가 벼슬을 했다. 할아버지는 진사공, 아버지는 부장공, 윤도령은 한림공이었다.

한림공이 어느 날 용연사에 소풍을 갔다가 '설화'라는 동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그 마을에 배동지라는 천석꾼의 집에서 비를 피했다. 어느덧 소나기는 개고 한림공은 말을 타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배동지에게 애지중지 키운 방년 18세의 무남독녀가 있었다. 이 딸은 그날 비를 피하러 온 한림공을 우연히 보게 되고, 사모하는 마음이 오래돼 결국 상사병이 되고 말았다. 연유를 모르는 배동지 부부는 돈을 아끼지 않고 약을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딸은 날로 수척해져 갔다.

딸의 모친이 딸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네가 먹을 것이 없어 이렇게 누웠느냐? 우리 집에 너만 건강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다그쳤다.

◆동네 전체에 해를 미친 상사병

그러자 딸은 "어머니 제 병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닙니다, 우연히 한 헌헌장부(軒軒丈夫)를 보았는데 그 후로 그분 생각에 만사가 귀찮아졌어요"라고 했다.

모친은 이 말을 부랴부랴 남편 배동지에게 전했고, 배동지는 딸의 상사(相思) 대상이 한림공임을 알게 됐다. 배동지는 "그러면 내가 가서 청혼해 보리다" 하고 방문을 박차고 나선다. 이 말을 듣고 누워 있던 딸은 너무나 기뻐 문밖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했다.

배동지가 약산마을에 이르러 할아버지인 진사공을 찾아가 대강을 얘기하니 진사공은 그의 아들 부장공에게 가보라고 했다. 부장공에게 가니 부장공은 다시 한림공에게 가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림공에게 갔더니 한림공은 "남녀가 유별한데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오!" 하고 일언지하에 배동지를 돌려세웠다.

배동지가 집으로 돌아오니 결과를 듣고 싶었던 딸은 문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소리에 딸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어버렸다. 그 후 윤씨 집안에 밤마다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이 나타났고, 그때마다 소나 말이 죽어나갔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 시작하자 남은 윤씨 가족들은 칠곡의 소학산(巢鶴山)까지 피신을 갔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화를 없애기 위해 윤씨 가문은 소학산과 약산에서 상사병이 든 처녀의 원한을 푸는 제사를 올렸고 그 후부터는 조용해졌다고 한다.

◆풍수지리로 전해지는 달성군 청사

달성군 청사는 1914년 대구시내 현재의 대구백화점 자리에 맨 처음 터를 잡았고, 1968년 남구 대명동으로 옮겼다. 다시 2005년 현재의 논공읍 금포리로 이전했고, 올해로 딱 10년을 맞았다.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상 현재의 군 청사 자리가 길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남의 지세는 백두대간으로 시작한 용맥((龍脈'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남으로 치달아 태백산으로 이어진다. 또 동으로 내달린 낙동정맥은 팔조령을 거쳐 대구의 진산인 비슬산을 만들고 북서쪽을 돌아 금계산(金溪山'489m)에 도달하고 금계산은 군 청사의 주산이 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금계산의 계자로 닭 계(鷄) 자를 썼지만 일제가 전국의 지명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시내 계(溪) 자로 바꿨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계산은 살찐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금계포란'(金鷄包卵)형 이다. 닭은 알을 많이 낳아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계산에 들어선 군 청사는 사람이 '살만한 곳'에 위치했고, 금닭처럼 대대손손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길지라는 것이다.

군 청사의 사신사(四神砂'풍수지리상 전후좌우로 본 네 개의 산)의 형세는 금계산 수두(垂頭), 인봉산 상무(翔舞), 청룡 완연(蜿蜓), 우백호 준거(蹲踞) 등의 원리에 충실한 모양이다.

금계산 본신 용맥은 공갈미산(66.8m)의 작은 동산으로 굽어지고 백호도 잘 감겨 있어 아주 좋은 편이다. 안산 역할을 하는 앞동산은 금형이고 멀리 조산은 전체 수형산(水形山)으로 잘 감싸는 득수형 명당 형국이다.

비슬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금계산 좌측 골짜기로 흘러 금포천과 합수돼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 하나는 금계산 우측에서 발원해 금당지로 흘러 강림지에 모여 역시 낙동강으로 향한다. 풍수지리학상 득수형 명당의 혈은 용이 물을 만나면 음양이 교합해 명당국세를 취하게 된다.

특히 군 청사는 좌향이 사자해향(巳座亥向'남동쪽에 앉아 북서쪽을 향함)으로 앞쪽에 물이 흐르고 뒤쪽으로 산이 있으면 합국이 길(吉)하고 합국이 될 때 건방(乾方'북서쪽)에 대문이 있으면 재록(財祿)이 왕성해지는 형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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