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필경의 에세이 산책] 생명과 인생과 돈

20여 명의 직원이 회사 부근에서 회식을 하고 2차를 가기 위해 차로 이동했다. 거나하게 취한 지점장이 손수 운전을 하려 하자 젊은 직원이 지점장 차 열쇠를 낚아채 운전대를 잡고, 다른 직원들이 지점장을 밀다시피 뒷자리에 태웠다. 그때는 자가용이 흔치 않아 직원들은 택시로 따랐다.

지점장을 태운 차가 우회전하여 약 1㎞ 정도 가다가 건널목에서 여대생을 치었다. 차를 멈춘 직원이 겁에 질려 지점장에게 애걸했다. "지점장님! 사실 저는 무면허입니다. 좀 살려주십시오." 만취한 지점장은 쉽게 흥얼거렸다. "알았어, 그럼 내가 수습하지." 택시를 탄 직원들은 사고 5분쯤 뒤에 사고 현장에 다다랐다.

여대생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얼마 뒤 응급실로 형사와 숨진 여대생 아버지가 달려왔다. 형사가 조서를 꾸미기 위해 누가 운전했느냐고 묻자, 지점장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혀가 잔뜩 꼬부라진 상태에서 자신이라고 순순히 응답했다. 그 순간 숨진 여대생 아버지의 주먹이 고함과 함께 날아왔다. "이렇게 술 처먹은 놈이 운전을 해!"

새벽에 술이 깬 지점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꽤 영향력 있는 친구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우선 경찰 조서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즉시 담당 형사를 찾아 진술을 번복했다. 비록 술김에 한 진술이었지만 이미 꾸민 조서 내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진술을 번복한 이야기를 들은 여대생 아버지는 그런 지점장을 책임 회피하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고 더욱 분노했다. 무엇보다 운전한 직원이 운전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는 종적을 감췄다. 젊은 직원은 과실치사로 실형을 살면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게 분명할 것 같은 두려움에 계속 부인했다. 그렇게 한 달을 끌었다.

20여 명 직원의 일관된 증언에 피해자 아버지도 점차 수긍하자, 운전한 직원은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형사 책임은 젊은 직원이 지고 지점장은 도의적 배상을 떠맡기로 했다. 지점장이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해야 할 금액은 지점장 부부가 결혼 10여 년 동안 맞벌이해서 아껴 모은 전 재산이었다.

지점장 부부와 지점장의 친구, 운전한 직원, 피해자 아버지가 마지막 합의를 위해 만났다. 운전한 직원은 커피숍 바닥에 꿇어 앉아 지점장과 피해자 아버지에게 한 달간 애를 먹인 점에 눈물을 쏟으면서 잘못을 빌었다.

진실 공방은 그렇게 끝났다. 커피숍을 나서면서 지점장 부인이 지점장에게 했다는 위로의 속삭임을 따라간 친구가 들었다. 친구는 주위 사람에게 부인의 그 말을 전했는데, 2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여보, 한 사람은 소중한 딸을 잃었고, 한 사람은 인생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돈만 잃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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