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한때 섬유의 도시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외지인들에게 대구의 자랑이라고 하면 사과와 미인, 그리고 섬유산업을 꼽곤 했었다. 그런데 대구 섬유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픈 우리네 역사가 숨겨져 있다.
대구가 사과와 더불어 섬유 도시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는 생사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온화한 기후와 비교적 양호한 수질, 그리고 노동력 공급이 용이하다는 이유로 일본의 주요 제사공장이 대구에 세워졌는데, 1921년 당시 전국의 제사 가마의 약 80%가 대구에 집중해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회사가 지금의 동인동에 있었던 야마쥬(山十)제사회사와 조선생사주식회사, 그리고 대봉동의 가타쿠라(片倉)제사방적주식회사 등이다. 이들 제사공장에 대한 얘기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서 성장한 식민 2세들의 구술 자료나 문학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그들의 기록에는 그저 당시 대구 풍경의 일부이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으로 언급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 공장에서 근무한 조선인 여공들의 구술 자료를 살펴보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여공들의 나이는 대개 13살부터 15살, 경우에 따라서는 12살 어린 아이도 있었는데 짐작하듯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고향을 떠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린 여공들은 하루 13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시간과 불결한 기숙사 시설, 초라한 음식, 그리고 공장 관리자에 의한 일상적인 폭력마저 감내해야 하는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15살 이하의 어린 여공이 많았던 이유는 당시 조혼 풍습이 남아 있어 아가씨들은 16, 17살을 전후하여 시집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적공장 여공들의 가혹한 노동실태는 비단 대구만의 상황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5년 이를 고발한 '여공애사'라는 책이 출판되어 일본 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1916년부터 공장법이라는 것이 시행되어 12세 미만 아동의 취로 금지와 12시간 노동제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대구에서는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당시의 여공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거나 폭력을 피해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저기 가는 저 각시 공장에 가지 마소. 한 번 가면 못 나오는 저 담장이 원수라오. 가고 싶어 가는가요, 목구멍이 원수이제 이내 몸 시들거든 사다리나 놓아주소."
이것은 1925년을 전후하여 대구의 제사공장 주변 여공들 사이에 유행했던 노래이다. 당시의 여공들의 신산한 삶을 대변하는 서글픈 노랫가락이다. 섬유산업은 이런 어린 여공들의 피눈물과 더불어 성장해 왔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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