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호남과 DJ, TK와 박근혜

20년 전의 일이다. 1992년 대선 3수에 실패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선생'(DJ)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뒤 치러진 1996년의 15대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필자는 매일신문의 'DJ 마크맨'으로 DJ의 '호남 유세 투어'를 취재할 수 있었다. 전북 정읍부터 시작해 전주를 거쳐 빛고을 광주와 전남 나주 그리고 DJ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목포를 가는 2박 3일 일정이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유세가 벌어지는 장소는 몇 시간 전부터 밀려드는 사람 때문에 마비가 됐다. 유세를 마치면 DJ가 탄 차량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빠져나가지 못했다. 다음 일정이 있다며 협조를 요청해도 사람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광주의 유세장이었던 광주교대 운동장에서는 DJ가 탄 무개차를 따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행진을 하는 바람에 광주교대 앞 대로가 행진 대열로 다 덮여버렸다. 심지어 목포 유달중학교 교정에서는 필자가 열렬한 DJ 지지자들에게 떠밀려 큰 사고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이후 필자에게 대한민국 정치와 'DJ와 호남'이라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20년이 지난 2015년 9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찾았다. 대구 정치의 상징이라는 서문시장이었다. 서문시장은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정치적 고비마다 찾아와서 '기(氣)'와 '힘'을 얻어 가던 곳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열기는 이전보다 더해 보였다. 박 대통령을 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과 상인들의 반응은 20년 전 호남에서 봤던 그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1998년 보궐선거를 통해 박근혜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할 때부터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그림 하나가 완전히 그려졌다. '박근혜와 대구'라는 조합이었다. 대구 사람들의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스타를 바라보는 팬들의 열광에 가까웠다. 마치 20년 전 호남을 돌면서 가졌던 '호남과 DJ'라는 조합을 연상케 했다.

사람들이 괜히 박 대통령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대구경북(TK)이라는 게 아니었다. 수치로도 알 수 있었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발표한 최근 6개월간 박 대통령의 일간 국정수행 지지도가 이를 입증한다. 전국적으로는 29.9~53.8%를 오르내렸지만 TK에서는 43.7~72.1%였다.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철옹성이라고 여겨졌던 30%의 벽도 허물고 29%대로 내려앉았을 때도 TK는 4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날 서문시장의 열기는 여론조사 수치 그 이상이었다.

이를 두고 19대 대통령 선거 이전 정치권의 진보 논객들은 '박근혜 현상'으로 이름 붙이고 같은 이름의 책도 펴냈다. 2012년 대선 때까지 박근혜 현상은 정치권의 주요한 화두였다. 대선 이후 사라진 이 말이 TK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임기의 전반기를 넘어섰지만 여전하다. 퇴임 후인 2018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이도 있다. DJ가 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TK 정치권에 정통한 한 인사는 "박 대통령보다 더 인기가 있는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으로 TK 정치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느냐"고 했다.

DJ 사후 호남 정치권은 열병을 앓고 있다. 호남은 DJ 이후에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호남'은 DJ 정신을 물려받은 '적장자'라고는 하지만 비주류로 밀려난 뒤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과거 지향적이라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TK 정치권은?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이니까 과거 지향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머지않아 박정희'박근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하는 동시에 미래를 열어갈 재목을 길러내야 한다. 솔직히 호남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불임' 지역처럼 돼 버린 호남 정치권의 현주소가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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