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역작 '사도' 내놓은 충무로 터줏대감 이준익

조선왕실 가족사'1000만 관객 신화'또 쓸까

세세하게 알려진 진부한 소재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로 커버

애국심 세대별 이슈 모두 배제 일반적인 상업영화 행보와 달라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명 넘겨 '왕의 남자'이후 10년 만에 기대감

영화 '사도'를 보고 나온 날,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이준익(56)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작입니다. 두고두고 칭찬받으시겠어요." 나름대로의 극찬이었다. '사도'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철저히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점에서 그려낸 최초의 사극. 송곳처럼 날카롭게 두 인물의 감정을 파고들며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작품이었다. 감정과 감정의 부딪침과 묘사가 치밀해, 지독하고 진한 멜로영화 또는 심리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명, '왕의 남자' 이후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표작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몇 마디 칭찬이 이어졌는데도 이준익 감독은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지금 평단에서 쏟아지는 호평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사도', 기존 상업영화 공식에서 벗어난 수작

배우들의 명연기와 탄탄한 구성, 또 연출 등 '사도'에 대한 극찬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 이쯤 되면 자연스레 누적관객 1천만 명 돌파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마치 '이 정도 스펙이면 1천만 명 돌파는 당연하며 그 정도 고지에 오르지 못하면 안타까운 일'이라는 정의라도 내려놓은 양, 은연중에 또는 직접적으로 '1천만'에 대한 압박을 가한다.

물론, 지난 16일 개봉 후 일주일 내내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관객 수 200만 명을 훌쩍 넘겼으니 '1천만'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국제시장'의 흥행추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속도다. 현재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추석연휴 기간에 성공적으로 관객몰이를 한다면 '1천만'도 가능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도'가 전형적인 흥행작의 틀을 갖춘 작품이 아니란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사도'는 흔히 거론되는 충무로의 상업영화와 사뭇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이미 세세하게 알려진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내부에 배치한 별개의 에피소드 역시 새로운 내용이 없다. 몇 개의 신이 유머를 품고 재미를 주지만 그 정도가 전부다. 시종일관 영화는 진지하고 무거우며 배우들의 감정연기 역시 농도가 짙어 한시도 관객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에 두고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까지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를 팽팽한 구성으로 보여주는 등 뛰어난 연출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유도하는데 분명 이런 전달법이 대중의 기호와 잘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갔다면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해도 좋았을 정도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는 만듦새다.

필자가 '사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행보와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처럼 애국심 마케팅을 하는 것도, 최근 '국제시장'과 같이 세대별 관점을 둘러싼 민감한 이슈도 없다. '베테랑'처럼 속 시원한 액션과 재미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상업영화 또는 기존에 1천만 관객 목표를 달성한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에 있는 '사도'에 '1천만'에 대한 압박을 준다는 건 그 자체로 무리수다. 대중성과 작가주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완성시킨 수작이며 흥행에 선순환을 일으킬 요소들이 많아 '대박'을 기대할 순 있겠지만, 지나친 기대로 부담을 주거나 향후 괜한 실망을 하지는 말잔 얘기다.

정확히 10년 전,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를 통해서 이미 한국영화사에 길이 회자될 기록을 남겼다. 당시 '왕의 남자'는 배급사의 일방적인 스크린 독점이나 밀어붙이기식 마케팅, 또 스타 캐스팅도 없이 오롯이 관객의 힘으로 한국영화 사상 세 번째 '1천만' 대열에 합류했다. 오히려 '왕의 남자'가 극장에 걸려 있을 무렵, 이준익 감독은 스크린을 확장하려는 배급사를 만류했다. 다른 작품에도 기회를 주고 공정한 경쟁을 하자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다. 이 때문에 '왕의 남자'는 마케팅과 캐스팅, 배급사의 파워게임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1천만'을 달성한 유일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000만 영화'의 전형적인 흥행공식에서 벗어난 '사도'로 또 한 번 대기록을 달성한다면, 한국영화계에 이준익이란 브랜드를 다시 각인시키고 재평가받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준익, 열린 감성 가진 충무로 어르신

이준익 감독은 1980년대 말부터 충무로를 지킨 한국영화계의 '맏어른'이다. 미대를 다니다가 서울극장의 합동영화사 선전부장으로 영화일을 시작했다. 이어 외화 수입 및 한국영화 제작자로 오랜 시간 활동하며 충무로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 등 히트작의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고 1993년에는 '키드캅'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가 크게 실패해 한동안 메가폰을 들지 않았다.

그러다 2003년 '황산벌'의 제작과 연출을 겸하며 다시 감독 복귀선언을 했고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2년 뒤인 2005년에는 '왕의 남자'를 통해 대한민국 세 번째 '1000만 영화감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영화가 만들어낸 폭발적인 팬덤에 힘입어 순식간에 샐러브리티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듬해 내놓은 '라디오 스타' 역시 호평과 함께 흥행에서도 괜찮은 성공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이준익 감독은 한국영화와 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하고 그 중심에 서기도 했다. 스타감독으로 부각되는 것뿐 아니라 충무로의 발전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부침도 심했다. '님은 먼 곳에'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야심 차게 내놓은 대작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됐다. 두 작품 모두 이준익 감독이 추구하는 연출의도가 대중이 상업영화에 바라는 지점에서 멀어져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일각의 호평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상업적 성과는 거둬들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2010년 '평양성'의 흥행실패는 이준익 감독의 발목을 걸어 넘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이준익 감독은 공식석상에서 반 농담을 섞어 은퇴발언을 했다가 괜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평상시 이준익 감독의 모습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그 말을 믿지 않았을 터. 하지만, 언론계의 세대교체가 이뤄진 상황이라 이 발언이 기사화됐고 이준익 감독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작품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화계 내에서 이준익 감독의 은퇴를 실제로 믿는 이들은 없었다. 이준익 감독에게는 쉴 새 없이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고심 끝에 받아든 시나리오가 2013년 개봉된 '소원'이었다. 은퇴 발언 논란 등으로 기운 빠진 상태에서 하필 아동 성폭행 소재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것 역시 이준익 감독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철저하게 피해 아동과 가족들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취지로 제작 또는 시나리오 개발을 하지 않고 연출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소원'은 개봉 후 호평과 함께 청룡영화상 대상작으로 선정되는 등 화제작 반열에 올라 이준익 감독의 재기를 도왔다.

'소원'으로 재기에 성공했을 당시 필자는 이준익 감독에게 "참 철이 없으세요"라는 말을 건넸다. 괜한 은퇴 발언, 그럼에도 또 한 번 논란이 될 만한 소재를 과감히 택한 그 용감무쌍함에 대한 질책과 칭찬을 섞은 표현이었다. 그때 이준익 감독이 내놓은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마흔 살까지는 꾸준히 철이 들어야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지. 그런데 더 나이 들면 오히려 그놈의 '철'을 빼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아니면 고집불통 노인네가 되기 십상이잖아." 50대 중반에도 유일하게 충무로에서 히트작을 내놓는 감독 이준익의 지론이었다. 맞는 말이다. 이 정도의 열린 감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나이에 '사도'와 같은 감각 있는 영화를 내놓을 수 있을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