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외국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최고 여행을 위한 조건에 대해 설문을 한 적이 있었다. 청취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였다고 한다. 모처럼 대구에 지역 등산인들의 멋진 산행을 인도할 진객이 찾아왔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이다. 매일신문사와 아웃도어 전문 업체 밀레와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시즌3'에 몸소 가이드로 나선 것이다. '한국 명산 16좌 원정대'는 지난 24일부터 내년 말까지 매월 1회 16개월 동안 열린다. 대구경북과 중남부 지역의 명산을 순례하게 될 이 행사는 앞으로 화왕산, 신불산, 문경새재 등 지역 명산을 오르게 된다.
지난 24일 '엄홍길과 함께하는 명산 16좌'의 첫 행사가 열린 비슬산 산행에는 동호인 800여 명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가을을 여는 첫 산행으로 지역 명산인 비슬산이 선정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인데 맨 앞에 엄 대장이 선다니 등산인으로서 이런 호사도 드물 듯싶다. 엄 대장의 힘찬 발걸음을 따라 비슬산을 다녀왔다.
◇세계 최장 규모의 암괴류…원정대 '감탄'
엄 대장의 힘찬 출발 소리를 신호로 일행은 데크를 따라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아침부터 안개를 풀어놓던 날씨는 이내 가는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캠핑객들을 맞아들이던 휴양림 데크엔 벌써 철 이른 단풍이 내려앉았다.
원정대 시즌 1, 2에 모두 참가했다는 박성춘(71'전북 전주시) 씨는 "호남지역 산행 때는 광주의 어머니 같은 무등산에 올랐는데 이번에 대구의 어머니 같은 비슬산에 오르게 되었다"며 "영호남의 모산(母山)을 모두 오르니 두 지역 화합의 의미를 저절로 되새기게 된다"며 소감을 말한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휴양림 끝자락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암괴류 전망대였다. 바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어 '돌강' '바위강'으로 부르는 암괴류는 해발 1,000m 고지 인근부터 시작해 중턱까지 이어진다. 세계 최장 규모다. 비슬산은 여인이 비파를 들고 하늘로 비상하는 '비천'(飛天)의 산세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산 곳곳의 암괴류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7줄의 비파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줄의 모든 매듭이 대견사 밑에서 묶인다고 한다. 즉 대견사가 한반도 지세의 모든 화음과 조화를 조정하는 조율 터인 것이다.
◇일제가 폐사한 대견사 100년 만에 중창
절을 온통 삼켜버린 안개, 그 정적을 깬 것은 각운 스님(대견사 주지)의 유쾌한 문화해설이었다. 스님은 유창한 화술과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비슬산의 역사를 재미있게 펼쳐보였다.
"일제는 총독부령으로 대견사를 폐사했는데 그 이유는 대견사가 한반도의 태(胎) 자리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1917년 일제가 탑을 부수고 요사채를 허문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을 불임(不妊)의 땅으로 만들려는 계략이었던 것이죠."
산정에 높이 올라선 절터가 대마도를 노려보는 기세여서 기가 꺾인 일본인들이 대견사를 겁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과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던 불교계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사찰 중창에 나섰고 대견사는 역사에서 사라진 지 정확히 100년 만에 우리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北鳳頂南大見' 지세에서도 최고의 영지
대견사 앞 3층석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등산객들은 대견봉으로 올랐다. 안개의 위세는 아직도 대단했고 10~20m의 조망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등산객들은 엄 대장을 잘도 알아봤다. 대견봉까지 가는 도중 '납치'되기를 여러 차례 '셀카 청탁'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사람 좋은 엄 대장은 시민들이 건네는 막걸리잔이나 산악회 기념촬영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제 조화봉 갈림길에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북적이던 인파도 한산해졌다. 이제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침묵 모드'로 들어선다.
얼마 전 한 풍수가는 전국의 '휴휴명당' 22곳을 소개하면서 그중 하나로 대견사를 꼽았다. 또 예부터 비슬산은 '북봉정남대견'(北鳳頂南大見)이라 부를 만큼 지세에서도 최고의 영지였다. 뚝 떨어진 수은주에 허한 기운을 채워줄 기(氣)가 필요하다면 엄 대장의 족적을 따라 비슬산을 올라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명산 16좌 원정대 가이드 엄홍길 대장
#"16개월 동안 중남부 명산 등정 함께해요"
"호남에서 첫 깃발을 올린 명산 순례 대장정이 충청지역을 거쳐 이제 대구경북으로 왔습니다. 앞으로 16개월 동안 중남부 지역 명산을 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 깊은 행사에 매일신문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한국 명산 16좌 원정대 시즌3 가이드로 나선 엄홍길 대장을 만나 소감을 들어봤다.
-대구와의 인연은.
▶대구엔 박상열, 고 박무택(계명대) 씨와 같은 훌륭한 산악인들이 많이 있다. 특히 박상열 선배님은 에베레스트산을 같이 오르면서 숱하게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16좌 산 선정 기준은 있나.
▶먼저 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인지 여부를 제일 먼저 고려한다. 1천~2천 명씩 대단위로 행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차 편의, 안전성, 접근성 등도 체크하게 된다.
-대구경북의 산 중 기억에 남는 산은.
▶팔공산엔 이미 여러 차례 오른 경험이 있어 그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다음 달에 오를 창녕 화왕산도 가을 억새 산행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이번에 비슬산 산행을 준비하면서 대견사가 천하의 길지, 명당임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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