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구백오십 년 팔월 토리노의 체사레 파베세는 자신의 수첩에 적힌 이름 하나 둘 셋 넷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네 "꺼져"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네
처음엔 낡은 엘피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에서 도어즈 혹은 넥스트 두번짼 길모퉁이 서점 한낮의 우울이라는 제목 따위의 책은 말고
그저 무심히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한 번 본 것 뿐인데 바람이 불면 누군가는 목이 붓고 미열에 시달리네 (……)
흰 소들이 어슬렁어슬렁 들판을 돌아오네 늙은 연금술사의 파오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나네 낡은 화덕은 쉼 없이 풀무질을 하기 좋았고 무쇠솥에 그을음은 자랑처럼 깊어가네
이미 있던 외경을 지나 이미 있던 의문문과 이미 있던 암호문을 지나 따로 또 같이 섞여 끓고 있네
새로이 방황하는 저기 새로운 방황하는 화란인 새로이 귀환하는 저기 새로운 귀환하는 그리스인
뭐라도 좋을 이름들의 이름들 따로 또 같이 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네
A의 가각본 B의 약사 제사기의 제四기, 뭐 다 그렇고 그런 거라네
(부분.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문학동네. 2013)
이 시가 실린 시인의 첫 시집 제일 첫 페이지는 '센티멘털 노동자 만세'로 시작하고 약력은 '센티멘털 노동자 동맹 동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박정대 시인은 강정, 리산 시인과 함께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를 결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급진적 감성 노동자. 이것이 가능한 개념인가 묻지는 말도록 하자. 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묻지도 말자. 이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충돌하면서 내는 문자적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줄 뿐이다. 문자적 소리는 개념화되지 않는다. 1950년 이탈리아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 이 시가 던져주려는 메시지는 없다. 단지 그는 '꺼졌다'. 말과 말, 이름과 이름들이 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어쩌면 이 이미지들이 파베세의 글들에서 따온 이미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의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삶이란 '뭐 다 그렇고 그런 거'지만, 시인은 그것에 의문을 가지고, 시비 걸고, 감성을 토해내는, 그런 의미에서 센티멘털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렇고 그런 우리의 삶을 지탱해 내는 것이다. 시인은 철학적 사유와 경구를 던져주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이 매력적인 시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상심하지 말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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