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1>-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국가관 투철했던 셋째형, 6·25전쟁 나자 제일 먼저 자원입대

※ 삽화: 이영철 화가
※ 삽화: 이영철 화가

◆ 프롤로그

대필하는 영광에 감히 제가 이 글을 적고 있다.

"막내 동생아! 시간이 나거든 언제든 좋다. 나의 6'25전쟁 참전기를 꼭 써 다오."

나를 만날 때마다 간곡히 그렇게 셋째형은 말씀하였다.

나에게는 큰형, 둘째형, 지금 이야기로 펼쳐 나갈 셋째형이 있고, 끝에 넷째 형이 있었다. 이 중에서 셋째형은 살아서 차성인(車城人) 이덕숙(李德淑)이요, 돌아가심에 항렬자를 따라 호가 청곡(靑谷)이며 평백(平伯)이었다.

이 글을 쓰는 제 나이 예순 다섯인데, 꼭 저만큼 되던 해에 셋째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무골호인 셋째형 인생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6'25전쟁 참전기를 셋째형 청곡 소원에 따라 꼭 남기고 싶었다. 이 내용을 아들'딸'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할 따름뿐이었다.

셋째형은 일자무학이라 경험을 글로 남기지 못하였기에 무지몽매한 막내 동생이나마 이렇게 필을 들어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의 청곡인생 이야기일 뿐이었다.

국가로부터 훌륭한 전공을 인정받지도 못하였기에 나 스스로도 이 글 만큼은 남기지 아니한다면 너무나 죄스럽게 생각된다싶어 시작하여 본다. 서양은 무식이 삼대면 지게를 놓고도 A자를 모르며, 우리 속담에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도 하였다.

제1부 이덕숙

1. 감나무 집 셋째아이

셋째형은 송명(松明) 수상(壽祥)과 경주최씨 송계당(松谿堂)부인의 셋째 아들이었다. 토함산 밑 경상북도 경주군 내동면 시래리(時來里)에서 태어났다. 고조가 무후(無後)여서 증조는 먼 인척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도 외동이었으나 운(?) 좋게도 4남매를 두었다. 그 중에 아버지는 둘째였다. 아버지 장가들자말자 연속 아들 셋을 낳았다. 자식이 많아야 살림 밑천이던 그 예전에는 칭찬받을 일이었다.

할머니는 가문을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고 좋아하였다. 손자가 갑자기 셋이나 생겼으니 좋아하지 않을 할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큰 아버지는 아들 하나, 작은 아버지도 아들 하나만 두었다. 고모는 시집갔으나 배태를 못하였다. 나중일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둘 더 낳았다. 할머니는 뒤에 낳은 손자 둘은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농사짓고 목수도 하여서 할머니집 앞에 직접 지어서 살았다. 오래전부터 있던 감나무에 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가을철이면 붉은 감이 먹음직스러웠다. 따다가 좋은 것은 곶감을 만들어 제사에 쓰고, 작은 것은 삭혀서 새참으로 먹었다. 감나무는 울타리 사이에 심어져 있었기에 땅을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이 오면 새싹 나오는 것을 보고 자연을 알았다. 감이 열리고서 감나무 밑에 거름을 넣고, 그 열매가 붉어지면 계절이 바뀌니 가을을 알게 되었다.

셋째형은 감을 모조리 따버리는 것이 아니라 까치밥으로 몇 개씩 남겨 두는 감나무 집 셋째아들이었다. 셋째형은 감나무 집 셋째로 불리면서 그 집에서 계속 살았다.

2. 어린 날 셋째형

셋째형은 큰형이 서당가고, 둘째형이 아버지 일 따라 가버리면 매우 심심하였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보아도, 동해 남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와서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릴없이 동사 마당에 나가면 사무실에는 동서기가 사무를 열심히 하는 것도 보았다. 혼자 자치기를 하다가, 팽이를 치다가, 구슬놀이를 하다가 할 수 있는 놀이는 모두 다 해보아도 혼자는 재미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서 풀 망태를 매고 풀 베러 나가 보았다. 도랑가 풀을 베는 데 제법 모아지면 망태에 꾹꾹 눌러 담아서 양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벤 풀은 송아지도 어미 소에게도 주면 고맙게 받아먹었다. 일손이 언제나 바쁜 어머니는 셋째아들이 혼자 심심해하면서도 시키지도 아니한 집안일들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에 신기해하였다.

"아이고! 덕숙이! 오늘 소 풀도 많이 베어 왔네. 착하네, 착해. 오늘 아버지 오실 때 사탕 사 오려나, 어디 보자."

혼자서도 알아서 일을 찾아하는 셋째아들이 신통방통하여서 칭찬하는 따뜻한 어머니 목소리였다.

두 형이 집으로 일찍 돌아오지 않으니 철길 밑 우물가 회화나무 밑에서 놀다가 물총이 생각나 열매를 주워서 물총놀이를 해 보았다. 그것도 혼자라서 재미가 없었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오포(午砲)인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덩달아 동해남부선 부산 가는 기차가 힘차게 지나갔다. 왼고개 높은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데 기적소리와 그 칙칙폭폭∼하는 소리는 조용한 위시래 마을에 괜히 시끄럽게 만들었다.

보리밥 그릇을 받아 찬물에 말아서 된장을 반찬으로 밥 먹었다. 시원한 물이지만 비록 보리밥의 깡마른 밥을 물에 말아서 밥맛을 내었다. 반찬이라고는 시커먼 된장을 풀어 호박 넣고 멸치 섞은 최고급(?)의 반찬이었다. 언젠가는 잘 살 것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밥 먹을 때 참 맛나 하였다.

간혹 작은 아버지가 일하는 연장이나 숫돌을 빌러 왔다.

"덕숙아! 혼자 노니? 동사에 가 봐라. 넓은 곳에서 놀아라."

"예. 작은 아버지."

대답은 아주 간단히 하였다. 동사에 가도 일보러 오는 사람 말고 친구들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회의실에 문 열고 들어갔다. 어른들이 담배 피우고 담배꽁초만 쌓여 있었다. 조용하게 담배꽁초를 모아서 불태우는 곳에다 갖다 버리고서 친구들이 오는가를 기다렸다. 친구는 모두 바쁜 모양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를 아니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빨래를 이고 삼거리 빨래터를 찾았다. 빨래 방망이와 검정 비누통을 들고 따라 나섰다. 위에서 어머니 빨래하고, 셋째형은 아래쪽 물에 들어가 장난치고 놀았다. 작은 개구리 한 마리 잡아서 놀았다. 간혹 길 위에서 도랑으로 개구리가 뛰어 들었다. 어머니 깜짝 놀라지만 개구리는 순간에 도망쳤다.

저 멀리 논둑길에 논둑 콩 자라고 있었다. 잎이 피고 무성하여 논둑을 덮었다. 논에서 간혹 뜸부기 우는 소리 들리고, 농병아리 줄을 맞춰서 나들이 데리고 다녔다. 푸른 하늘에는 정찰기 소리 들렸다. 제트기가 하늘에 흰 연기를 뿜어 자기가 지난 길을 꼬리 만들어 놓았다. 이때쯤 동네 낮닭이 심심해서 한 번 울어 주었다.

평화로운 시골의 오후 방죽에서는 황소 울음소리 들렸다. 간혹 신작로에서는 급정거를 알리는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철길을 넘어 귓전까지 들렸다. 한가한 마을의 소음에도 물에서 장난치다가 어머니 빨래 모두 마치면 거들어 들고 집으로 가져 왔다. 빨랫줄에 걸고 바지랑대를 치켜세웠다.

또 오후의 황소울음소리 들리고 중간에 풀을 넣어 주었다. 큰 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청하였다. 피곤한 하루가 언제이듯이 스르르 잠이 오고 말았다.

3. 끝에 오빠

셋째형은 동생이 없다가 밑으로 줄줄이 여동생이 생겼다. 큰 여동생, 둘째 여동생, 셋째 여동생이 있었다. 셋째형은 여동생들이 많아서 좋았다. 큰형은 매일 서당으로 직행하고, 둘째 형은 목수인 아버지 따라 일 나가고,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 셋과 소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즐거웠다.

가장 큰일이 소 풀을 베어서 지고 와야 했다. 외양간에 거름을 쳐 내고 새로이 바닥 짚을 깔아 놓았다. 무럭무럭 자라는 소들을 보며 즐거워하였다. 가장 돈이 잘 느는 것이 소 먹이 일이었다. 쇠죽을 끓이고 퍼다가 구유에 넣어주고 하는 일에 아주 숙달이 되어 있었다. 웬만한 집안일은 아버지 없이도 모두 척척해 내었다.

가까운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오는 것도 주된 일이었다. 낙엽이나 갈비를 긁어 오고, 집에서 땔감으로 하는 나무를 모두 해 오는 것이었다. 나무하면서 땀 흘리는 만큼 그 결과는 즐거운 일이었다.

나무를 해 와서 방마다 군불을 때어야 하였다. 닭에게 줄 먹장 개구리를 잡아다 마당에 놓아먹였다. 큰 닭들이 소소한 용돈 버는 것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우물에 물 긷고 여물 썰고 풀 섞어 쇠죽을 준비하였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자꾸 낳아서 마릿수가 늘어난 것이 농촌에 사는 재미였다.

논농사도 넓혀서 마지기 수가 늘어나고, 일이 폭주하였다. 농사일은 할수록 늘어만 갔다. 농사철에는 둘째형도 아버지도 함께하여 재산이 늘어나는 재미가 소소하였다. 큰형은 언제까지 공부만 하려나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맏이니까 열심히 공부하여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언연 중에 알고는 있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올망졸망한 여동생들이 있어서 즐거웠다.

"끝에 오빠! 끝에 오빠!"

부르는 여동생들의 소리에 하루의 힘든 일이 저절로 녹아 내렸다. 아들 셋, 딸 셋에 부모님과 여덟 명으로 바글바글 함께 살았다. 사람 사는 재미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었다. 셋째형은 어린마음에 남자 형님도 여자 동생들도 많아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아버지 글 배우지 못함으로 아들을 내리닫이 셋을 낳으면서도 부탁한 이름이 남자이름에 숙(淑)자를 항렬 아닌 항렬처럼 지었으니 이름들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족보도 찾게 되었고, 아들 이름을 개명하였다. 문숙(文淑)은 정백(正伯)이요, 무숙(武淑)은 성백(成伯)이요, 덕숙(德淑)에서 평백(平伯), 무부(武夫)에서 원백(源伯)으로 바뀌었다.

사랑채가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하였다. 넷째 여동생이 태어나고, 넷째 남동생도 태어났다. 아버지는 즐거웠다. 아버지의 뜻대로 자식들을 많이 낳았고, 모두가 쑥쑥 잘 자라났다. 자그마치 아들 넷에 딸 넷으로 식구가 어느덧 열 명이었다. 해방되던 해에 큰 형은 이미 열여덟에 장가를 가서 4년이 지났다. 둘째 아들 열아홉 살, 셋째형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여동생들도 나이가 들었다. 큰 여동생이 열네 살, 둘째 열한 살, 셋째 여덟 살, 넷째 다섯 살이 되었다. 남동생은 두 살이 되던 해이었다. 열 식구가 사랑채를 두고 외양간, 헛간이 있었고, 남으로 대문채에 오래된 감나무에서 감꽃이 피었다.

어느 하루도 일 없는 날이 없었다. 열여섯 송계댁 셋째 아들은 힘이 세었다. 동네에서 온갖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 내었다. 누구나 집집마다 사람이 재산이었다.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아버지는 고조의 무후에서 많은 자식이 필요하다는 인간생활의 띠를 알고 있었다. 자손만대 대대로 이어가는 자손의무를 잘 꾸렸다.

울 밑에 호박 심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라듯, 뒤 곁에 박을 심고 초가지붕에 새하얀 박꽃을 피우듯 자식농사에도 부지런하였다. 1946년 다섯째 누이 종출(終出)이 태어났다. 그러나 잘 못 먹고 병약하여 3년 만에 염병으로 죽고 말았다. 1949 기축(己丑)년에 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영백(泳伯)으로 얻었다.

자식을 많이 두어 차성이씨 가문의 전통을 만들었다. 스스로 마을의 촌장으로서 어려운 일에도 앞장섰다. 도랑치고 가재 잡듯 동민을 위해 물길도 틔우고, 길 닦고, 마을 청소도 두루두루 하였다.

찾아오는 과객들 밥 먹여 주고, 잠재워 주며 후한 인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셋째형은 자라면서 아버지의 그런 행위를 언연 중에 배우고 느끼면서 자라났다.

4. 천수답 물대기

셋째형이 어렸을 때 논이 조금 늘었다. 경주분지에서는 거개가 천수답이었다. 관개수로가 정비되지 못해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다. 자기모양 생긴 대로 도랑들이 뱀처럼 구불구불하였다. 그런 시대의 들판이었다.

어렵게 물을 구해 모내기를 한 논이었다. 이튿날 뜨겁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논바닥이 마르기 시작하였다. 논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터 갈라지고 심은 모는 물 달라고 애원하듯 하였다. 논에 댈 물은 없고 낮에는 아예 물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논에 물이 있어야 모가 자랄 텐데 문제였다.

물 대려면 새벽녘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여야 했다. 함지박 네 귀에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밧줄을 꿰었다. 각 두 곳씩 묶어서 낮은 곳의 물을 퍼 올릴 기구를 만들었다. 삽과 괭이를 들고 경주 남천 상류인 시래 거랑에 구덩이를 팠다. 거랑에 구덩이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추측을 한 뒤에 한 곳을 정해 파 들어갔다.

셋째형과 머슴들이 동해남부선 시래 철교 밑 하천에서 구덩이를 어느 정도 파내려가니 물이 비쳤다. 물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깊이 팔수록 둘레의 흙덩이가 무너져 내렸다. 가마니를 펼쳐서 무너져 내리는 모래를 중지시켰다. 논에 물을 대기위한 급한 대로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을 모아 두었다. 물을 찾아 두고서 어찌하면 논으로 물을 가져 갈 수가 있을 것인가 고민하였다.

푹 꺼진 하천의 물웅덩이에서 물을 논으로 가져가야 했다. 준비된 함지박을 이용하여 두 사람이 양끝의 끄나풀을 잡고 도랑 쪽 위로 물을 퍼 올려야 했다. 도랑의 길이는 약 천m를 타고 내려가야 천수답이 있었다. 이 도랑으로 하천바닥의 물을 퍼 올려 내려가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도랑으로 올라 온 하천바닥의 물은 아직 그 양이 많지 않아서 도랑바닥의 흙 속으로 사라졌다. 논으로 도착하기까지는 아직도 멀고 멀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무 짝 가래를 들고서 논으로 내려오는 도랑가에서 흙을 파 보기도 하였다. 퍼 올리는 물이 논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를 연구하였다. 이내 상황을 파악하였다는 듯이 누나들을 동원하여 들것에 헛간의 재를 모두 퍼 오라고 하였다. 사라지는 물을 조금이라도 덜 사라지게 하려고 우선 급한 김에 재를 퍼다 덮은 것이었다.

머슴과 셋째형은 물웅덩이 아래에서 도랑으로 연결된 입구로 물을 퍼 올리기 시작하였다.

"어 엿∼차 영차! 어 엿∼차 영차!"

"쏴아∼! 쏴아∼!"

가뭄에 물 한 방울 없는 도랑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전신의 힘을 다해서 웅덩이 물을 퍼 올리고 자꾸 퍼 올렸다. 이 물이 벼를 살려서 잘 자라도록 바라기 때문이었다. 벼는 물이 있어야 살았다. 마치 사람이 밥을 먹듯이 벼는 물을 먹어야 살 수 있었다.

낮이 되면서 머리 위의 태양은 마치 구워 먹을 듯 이글거렸다. 뜨거운 태양을 견딜 수 없어서 천막을 위에다 치고서 물을 퍼 올렸다. 머슴과 셋째형 둘이서만은 계속 물을 퍼 올릴 수 없었다. 사람을 바꾸어 물을 퍼 올려야 했다. 겨우 도랑에 물길이 이어지면서 천수답 논에 물길이 찾아오고 있었다. 도랑에 물줄기가 이제 따라 와서 논바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지나고 땅거미가 내렸다. 어둑해지면서 밤을 밝힐 등불이 켜졌다. 역 밑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천지가 캄캄하였다. 가장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새카만 들판의 언덕에 앉아 있기도 무섭고 그만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무수한 잔별이 떠 있었다. 하늘도 하도 맑아서 별이란 별은 온통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하수 가로질러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날 다리처럼 보였다. 가장 북쪽에 우뚝 서 보이는 북두칠성의 일등 별들이 제 빛 자랑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자기를 보라고 말하듯 하였다.

"간밤에 분명히 물을 댔는데 그 물은 어디로 갔는지 없네."

우리 논은 천수답이었고, 물은 댈 때만 있었다. 물 대는 것을 떼버리면 금방 말라버렸다. 사라진 물은 모두가 벼 뿌리를 적시고 갈라진 논바닥 사이로 흘러들어 갔으니 그날 묘답 다섯 마지기의 모는 간밤에 퍼 올린 물을 먹고 싱싱하였다.

5. 개잎갈나무 아래에서 참외 팔기

셋째형은 이제 열여덟에 이르렀다. 어머니 따라 시장에도 다녀 보았다. 바쁜 틈바구니에서도 돈을 벌려는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밭이 귀했다. 셋째형은 밭농사가 즐거워 보였다. 막상 밭농사를 하려니 마땅히 가진 밭이 없었다.

셋째형은 꾀를 내었다. 집에서는 밭이 없지만, 신계나 외동면으로 나가면 밭이 많이 있었다. 밭농사를 하는 집으로 한가로이 구경 나섰다. 밭에서는 여름 농사로 참외와 수박을 심어 두었다. 이른 여름에는 아직 참외나 수박이 달리지 않는데도 농부들이 밭에 들어가서 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참외밭에 엎드려 햇순을 자르고 있었다. 밭농사 중에 참외농사를 하려면 부지런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셋째형은 번쩍하는 생각이 났다. 사람이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남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참외를 사다가 다시 소매로 팔면 되었다. 가진 밭이 없어도 생산된 농산물은 팔면 이윤이 남게 되었다. 판매처는 무엇보다 관광지 불국사기차역 앞이 있었다. 관광객 소비자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참외장사를 시작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결정하였다. 이번 여름에는 참외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굳게 마음먹고 지게를 정비하고, 바지게를 얹어 참외 사러 나갔다. 그랬다. 참외는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 참외는 줄이 죽죽 난 개구리참외를 사러 가는 것이었다. 개구리참외를 하나 얻어서 껍데기 깎고 속을 들여다보면 깎인 자리 그 속이 붉다는 것을 알았다. 칼로 잘라서 한 쪽을 입에 넣어 보면 설탕이 거의 없던 시절에 설탕 이상으로 맛이 달았다. 개구리참외는 무게가 개당 600∼1000g에 달하였다. 일반 참외와는 달리 녹색바탕에 개구리 얼룩무늬를 띠고 있었다.

아예 소매장사를 위해 보자기와 작은 칼과 양푼이 그릇을 준비하였다. 종자돈으로 참외 밭에 가서 참외를 골라 샀다. 한 바지게 가득히 짊어지고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 앞에 사시사철 상록수인 개잎갈나무 아래 그늘에다 지게를 바쳤다.

잘 익고 얼룩져 있는 개구리참외를 보자기에 펴 놓았다. 일단 세 개씩 무더기를 만들어 두었다. 개구리참외가 맛있다는 것을 선 보여야 했다. 작은 칼을 내어 참외 꼭지로부터 꽁지까지 깎아 내렸다. 껍데기마저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쥐고 있는 손등 위로 남겨 두고 계속 깎았다. 개구리참외 속이 붉게 비춰 나왔고, 누구나 보면 침이 절로 넘어 가는 그런 참외를 선보였다.

양푼이 그릇에 깎은 참외를 잘라 모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참외장수가 되어야 하였다. 소리를 외쳐야 했다. 저만치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붉고, 달고, 맛 좋은 개구리참외 사이소! 그리고 맛도 보이소! 공짭니다."

셋째형은 떠나갈듯이 고함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모기 소리보다 작은 소리밖에 나오질 아니 하였다. 그늘에 놀러 나온 어르신이 한 마디 거들었다.

"젊은이! 장사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기운도 없이 기 들어가는 소리냐? 어디 젊은이답게 큰 소리로 질러 봐! 자! 여기 젊은이 참외를 가져 와서 판데요, 여기, 이리로 와 보세요. 그리고 공짜로 맛도 보세요!"

지켜보던 어르신이 하도 답답하여 소리를 질러 주었다. 무료하게 기차시간을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공짜로 맛보라는 소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양푼에 깎아 놓은 개구리참외 조각을 집어 들고 맛보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바지게에서 내려놓아 전을 폈다. 한 무더기 세 개씩 묶어 두었다. 한 바지게 한 접(100개) 개구리참외 무더기를 일시에 모두 팔았다. 장사가 제법 잘 되었다. 개구리참외를 다시 사러 가야 했다. 배도 고프고 힘들었지만 이렇게 잘 되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장사를 꽤 잘한 것이었다. 오전에 이미 벌써 두 번이나 다녀왔고, 점심을 요기로 때운 후에 벌써 두 행보를 하였다.

간혹 동해남부선에는 부산으로, 서울로 가는 기차가 들고나고 하였다. 허연 수증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가 왕래하였다. 관광객들이 타고 내리면서 개잎갈나무가 줄 지어 늘어선 역전의 그늘 아래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6. 전운에 묻혀

셋째형은 쇠풀을 베어야 하고, 방을 덥힐 허드레 나무를 하여야 했다. 산성화된 땅에 낼 퇴비를 만들어야 했다. 콩밭에 넣을 퇴비는 특히 외양간에 밟힌 짚에서 좋은 거름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나면 쇠스랑으로 외양간 거름을 모았다. 거름에다 도랑가에 나는 자연 풀을 베어 섞어서 질 좋은 퇴비를 비축하였다. 셋째형은 농사 짓고, 밭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셋째형은 누구보다 열심히 닭을 키우고 모이도 주었다. 강아지를 세 마리나 키워 푼돈을 만들고, 소를 키워 송아지도 낳고 하루하루가 즐거운 생활이 되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 장가를 보내서 살림을 내어 주었고, 둘째형과 셋째형을 데리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전쟁 소식이 들리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버지는 피란을 가면서 다른 식구는 모두 두고 둘째, 셋째 형만 데리고 피란을 가버렸다. 어머니와 딸 넷과 넷째 형까지 가만 두었다. 피란 간 거리는 고작 4km이었다.

온통 나라 전체는 전운(戰雲)에 휩싸였다. 낙동강을 남기고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풍전등화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피란지 경주군 외동면 북토리에서도 집을 또 지었다. 피란민들이 들이 닥쳐 먹을 것이 동이 나고 말았다. 용케도 피란을 간 곳에서 보니 다행스럽게도 전쟁터가 안 되어 둘째형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0세 이상 남자는 모두 징집하여야 한다는 소식이 나돌았다. 대동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자꼭지들이 모두 잡혀가던 시절이 있었고, 큰 형은 감나무에 올라가서 잡혀가는 것을 피했다고 하였다.

대동아 전쟁은 남의 나라 전쟁이지만, 6'25전쟁은 우리나라 전쟁이었다. 셋째형은 국가관이 누구보다 투철하고 왕성하였다. 셋째형이 제일 먼저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다. 군대입대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징집자를 축하하였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마을을 돌았다. 농악대들이 가는 곳마다 막걸리 통을 내어놓고 술을 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곤 하였다.

셋째형은 군대로 자원입대 하여 갔다. 1950년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일찍 나온 보리 싹이 부끄러워하였다. 전쟁은 전면전으로 되었다. 큰형은 제주도로 가서 군대 훈련교관이 되었다. 둘째형은 서둘러 결혼한 후에 강원도 속초에 배속되었다. 자원입대한 셋째형은 김해공병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방에 배치되었다는 군사우편이 도착하였다. 아울러 종형도 입대하여 포항전투에 참가하였다.

셋째형 부대는 육군 공병으로 전투공병과 시설공병으로 구분되었다. 전투공병대는 보다 최전방과 전투현장에서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반면, 시설공병은 일반 민간건설 토목회사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투공병은 최전방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다.

셋째형은 온통 나라 전체에 번져 전쟁이 벌어지는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 필자 약력

- 이영백(65) 씨

- 전 영남이공대 교무과장

- 현 'e이야기와 도시' 창작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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