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거로운 조리 과정 없이 포장을 뜯고 뜨거운 물을 붓거나 전자레인지 버튼만 누르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들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해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인스턴트식품을 먹으면서 맛의 깊이를 음미하거나 우리 몸에 끼칠 긍정적 작용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미감을 거침없이 자극하는 화학조미료의 위험한 유혹을 우려하면서도 우리의 뇌는 어느새 인스턴트식품들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 그리고 그에 힘입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인문학 강연들이 방부제 향이 그윽한 인스턴트식품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지적 미감을 피상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온 나라의 골목골목이 인문학으로 야단법석인 지금, 우리가 은연중에 모범으로 삼고 있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인'(萬能人)이다. 모든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미술가로서 혹은 사상가로서 시대를 뛰어넘는 인류의 보편적 정신을 구현했다. 하지만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을 슬쩍 곁눈질하거나 '인문주의' 혹은 '문예부흥' 등과 같은 책 속의 '죽은 개념'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는 인문학의 본질을 피부로 느낄 수가 없다. 공감할 수도 체감할 수도 없는 인문학, 어쩌면 자기 과시를 위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처럼 그저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해 겉모양만 번듯한 '짝퉁'은 아닐까?
허겁지겁 인문학적 지식을 폭식하고 있는 사이 아주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바로 우리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것이 인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적 '사유'라는 것이다. 인문학적 사유의 출발은 주변의 크고 작은 사태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렇게 형성된 가치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작동시키는 추진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인문학적 사유를 지지하고 있는 '논리성'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심 있게 들어줄 줄 아는 '관용'이라는 틀 혹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득력이 결여된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판단으로 흘러가기 십상이고 이는 십중팔구 소모적인 감정적 '언쟁'으로 번지게 된다. 이 같은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는 일 없이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 생각을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성찰을 통한 교양이 선행되어야 한다. 진정한 인문학의 묘미는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설파되는 이론이나 사상의 습득이 아니라 상식을 가지고 서로 소통하려는 태도에 있다. 소셜네트워크(SNS)가 보편화되면서 소통을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인문학'을 통한 능동적인 사유 주체이다. 우리네 사람살이에 인문학적 사유가 풍성해져 살맛 나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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