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명의 시와 함께] 사건A

#사건 -송기영(1972~ )

몸의 70%는 언제나 사무실에 있다. 1%는 집에, 3%는 길 위에, 4%는 어느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점심을 제때 먹을 확률은 50%, 이중 국적의 갈비탕을 먹고 주인 여자에게나 욕할 확률은 80%이다. 수치가 높을수록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말하고, 낮으면 변했다고 한다. 대꾸할 확률은 날씨가 나쁘면 50%, 좋으면 5%. 저녁마다 비치적비치적 비만 왔다. 사무실을 나온 70%가 곧바로 집에 돌아갈 확률은 15%, 술집에 앉아 노닥거릴 확률은 80%, 나머지는 마른 안주와 젖은 안주 사이에 낮게 깔려 있다. 어느 쪽이든 12시를 넘길 확률은 80%, 잔소리 들을 확률은 90%이다. 이때 내가 화를 낼 확률은 30%, 그랬을 경우 오래 살지 못할 확률은 95%라고 그녀는 말한다. 냉장고에서 2%를 꺼내든 채, 엉덩이를 30%쯤 까고 변기에 앉아 잠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날 확률은?

(전문. 『.zip』. 민음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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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바디우처럼 말하자면,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때 사건으로서의 진리는 기존의 지식과 관습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서의 진리다. 사건이 사건으로서 식별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건들 사이를 진동하면서 차이를 발생할 때이다. 이 시는 확률적으로 우리 삶을 진동시키기 때문에 차이를 발생시키는 듯이 보인다. 마치 그 진동 내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여기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고, 제목이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과 다르게, 이것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삶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의 왼팔은 러시앤캐시의 것이다. 오른팔은 레드코프, 다리 하나는 논스탑크레디트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허가 캐피탈에 등록되었다."(「거위의 꿈」 부분) 그리하여 그 생활은 비루하다. "전복. 전철에 올라타 입 벌린 채 침 흘리는 전복. 꼭 사십오 년을 살았고, 차장 진급을 앞둔 전복. 이마 껍질이 약간 닳은 전복. 눈에 분비물이 자주 끼지만, 그래도 아직 탱탱하다고 창찬받는 전복. 기본적인 양식을 갖춘, 거기서 양식되는 전복."(「175센티미터의 전복」 부분)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이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유적 본질 어쩌고 하는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 생각으로만 볼 때, 이건 사건이다. 어떻게 우리의 삶이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우리의 삶은 사건으로 식별되고 식별되어야 한다. 이 시의 제목이 '사건'인 것은 역설적으로 옳다. 다만 우리는 이 삶이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에 정돈되어 있을 따름.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날 아침 일어날 확률'이나 계산하며 매일 잠들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삶이 사건으로서 식별되고 진리를 생산하기 위해서 정녕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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