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은 길재, 구미에 은거 세상을 비추다]<1>큰 뜻의 좌절

"두 임금 섬길 수는…" 백이·숙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길

냉산과 낙동강을 끼고 있는 구미시 해평면 전경. 해평 길씨 문중의 역사가 시작된 지역이다.
냉산과 낙동강을 끼고 있는 구미시 해평면 전경. 해평 길씨 문중의 역사가 시작된 지역이다.
문중 후손들이 보관 중인 야은 길재 선생 위패
문중 후손들이 보관 중인 야은 길재 선생 위패
구미시 도량동에 위치한 야은 길재 선생 재실 충효당
구미시 도량동에 위치한 야은 길재 선생 재실 충효당
구미시 도량동에 위치한 야은 길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
구미시 도량동에 위치한 야은 길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는 고려 말의 충신이자 대유학자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구미'선산이 낳은 위인이다. 길재는 고려가 멸망할 무렵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낙향, 남은 생애를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며 보냈다.

조선에 귀의하지 않았지만 성리학 학통을 엶으로써 영남 사림 학맥을 길러냈고 결과적으로 역설적이게도 조선 왕조의 유교적 통치 이념의 기반을 제공했다. 은일자중하며 고고했던 길재의 삶을 되돌아보고 오늘날 구미'선산 곳곳에 살아 숨 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고려 우왕 때인 1388년 음력 6월 초. 개경(개성)에는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대륙의 신흥 세력인 명나라를 치려고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장군과 조민수 장군의 군대가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 장군을 사로잡고 임금을 억류한 직후였다. 큰 정변이 일어난 만큼 앞으로의 정세는 알 길이 없었다. 벼슬아치들과 백성은 숨죽인 채 고려 왕조의 수명이 다했다는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최영 장군은 죽임을 당했고 우왕은 폐위돼 그의 아들인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 젊은 관료 길재는 순유박사(諄諭博士)의 직책에 있었다. 유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수직에 있었던 셈인데 후학들이 사적으로도 찾아와서 그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학문과 도덕성은 뛰어났다. 직위가 높지 않았지만, 성품이 강직했고 충효사상이 확고했기에 후학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들에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누구 하나 대놓고 이성계 세력을 비판하지 못했다. 길재 역시 고려 왕조의 쇠망을 직감하고 사태를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성균관에서 우연히 읊음'(泮宮偶吟)이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용수사 동쪽 기슭 야트막한 담장이 기울었고(龍首正東傾短墻)

미나리 논가에는 버들가지 늘어졌네(水芹田畔有垂楊)

몸은 비록 남들 좇아 특별히 뛰어난 것 없지만(身雖從衆無奇特)

뜻인즉 수양산에서 주려 죽은 백이숙제 그것이라네(志則夷齊餓首陽)

백이와 숙제는 중국 고대 은나라 때의 전설적인 인물들로 형제 사이였다. 이들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 은나라를 멸하고 주 왕조를 세우자 신하가 천자를 거스른다 하여 반대했다.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 이 시에서 길재도 고려 왕조가 멸망하면 백이와 숙제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백이'숙제는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다한 인물로 당시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으며 길재도 그들의 충의를 흠모하고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길재는 2년 뒤인 공양왕 2년(1390년), 벼슬을 버리고 개경을 떠남으로써 백이'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갔다.

◆관료로서의 이상, 역성혁명에 꺾여

길재는 조정에 출사하면서 성리학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관료가 되길 꿈꿨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관료가 되길 원했다. 임금을 성군이 되는 길로 이끌고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만드는 것이 벼슬 가진 자의 도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만난 어지러운 시대는 자신의 뜻을 펴기가 어려웠고 그는 결국 고향에 숨어 사는 길을 택했다. 길재가 나중에 낙향해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후산가서'(後山家序)의 내용 일부를 보면 그의 가치관과 심정을 알 수 있다.

'다만 힘들여 밭 갈고 정성껏 학문을 닦아 아래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위로 임금을 섬기되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임금은 요순(堯舜)이 되게 하며, 당우(唐虞) 때의 백성, 삼대(三代) 때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었으나, 이제 와선 불행히도 하늘이 무너지는 때를 만나, 십년공부가 다 소지(掃地)되고 말았도다. 아 슬프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 무엇이라 하리오, 그러므로 방황하고 개탄하다 훌쩍 마음을 돌려,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나월(蘿月) 아래 관 벗어 걸고 청풍에 시 읊으며 천지지간을 부앙(俯仰)하고 세상 밖을 방랑하며, 그 시대의 책임을 지지 않고 길이 성명을 바르게 보전한 바 같지 못하니 이러고 보면 하늘을 찌르고 우주 밖으로 벗어져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천 필의 말과 만석의 쌀을 지닌 부귀인들, 부러워할까 보냐.'

길재는 이 시에서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삼대일월(의 태평성대를 이룩하고자 염원하였으나 역성혁명이 일어나 십년공부가 허사가 되고 말았음을 한탄했다. 대장부의 이상이 무너졌으므로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물러나 대자연 속에서 절의를 지키고자 했다.

길재는 22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사마감시에 4등으로 급제했으며 3년 뒤 진사시에 합격했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국가의 녹을 받으며 학문에 정진하는 신분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해의 가을에 청주목 사록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청주로 내려가기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거나 벼슬길로 나아가기보다 개경에 머물면서 학문 닦기를 더 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1387년에 35세의 나이로 첫 벼슬인 성균학정(成均學正)에 오르고 다음해에 순유박사, 그해 겨울에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됐다. 이듬해에는 종7품인 종사랑 문하주서(從事朗 門下注書)의 직위에 올랐고 다음 해인 1390년에 노모 봉양을 핑계로 관직을 내던지고 낙향 길에 올랐다.

길재는 불과 3년간의 관직 생활만 하고 38세 때 개경을 떠났다. 물러날 때의 관직은 미관말직이었지만, 생원시'사마감시'진사시 등을 거치고 성균관의 보직을 단계별로 거친 후 중서문하성에 진출했기 때문에 앞길이 창창한 소장 관료였다. 더욱이 그가 몸담고 있던 중서문하성은 모든 정무를 총괄하고 간쟁을 맡은 부서로 정치'행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점을 고려하면 관료로서 그의 앞날은 밝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고려 왕조가 쇠망할 것으로 판단한 후 모든 것을 훨훨 털어버리고 미련 없이 관직을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야은이 높은 문관의 벼슬과 무관의 위세를 뜬구름같이 보고 은거하니 고향에는 작은 땅과 초가집에 사립문"이라며 명리를 멀리한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무거운 낙향 길, 슬픈 소식들

길재는 낙향하는 길에 큰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을 찾아 뵈었다. 길재의 제자 박서생(朴瑞生)이 나중에 기록한 행장(行狀)에 따르면 '庚午(경오'1390년) 봄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노모가 계신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렸다. 돌아가는 길에 장단현(長湍縣:현재의 파주시'연천군 일대)을 지나게 되어 목은이 거처하는 곳으로 찾아가 그 뜻을 아뢰었다. 목은이 정중하게 대했고 시를 지어 주었는데…'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색이 길재를 위해 지은 시는 '문생 길주서가 얼마 전 집으로 찾아왔다. 노소를 이끌고 선주(善州:선산)로 돌아가는 길에 작별하러 왔다면서 하룻밤 자고 갔다'(門生吉注書頃次于家携老少還善州來別一宿而去)라는 제목으로 전편이 전해온다.

성균관에 노닐 때는 경전에 통달했단 소리 들고(從遊伴水號通經)

급제해 주서돼도 새파랗게 젊기만 한데(及第注書雙鬢靑)

가족들 이끌고 고향으로 간다면서 작별하러 왔으니(辭我携家故鄕去)

내 대답이야 쓰디쓰게 정중할 수밖에 없네(且聆吾語苦丁寧)

글 읽는다는 건 옛 어진 이 자취 따르고(讀書須踐故人迹)

나라 위한 경륜이 천자의 뜰까지 미쳐야 하거늘(對策要登天子庭)

높은 벼슬 우연히 와도 덥석 받을 바가 아니라(軒冕儻來非所急)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 아득하게 멀어져 가네(飛鴻一箇在冥冥)

이색 역시 이 무렵 곤궁한 처지였다. 이성계 일파의 공세에 밀려 그 역시 장단으로 낙향한 처지였는데 길재가 다녀간 한 달 후 그곳에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길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이어서가 아니고 일부러 옛 스승을 찾아 뵈었다.

고향 선산으로 내려온 후 길재는 되도록 귀를 막고 지내려 했으나 슬픈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이색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유배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낙향 다음 해 강릉에 유배 중이던 우왕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듬해인 1392년에는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격살당했고 뒤이어 고려 왕조가 멸망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혹은 객원기자)

도움말:길화수 (사)금오서원보존회 부이사장(야은 길재 17대 종가손)

이택용 경북정체성포럼 선비분과위원(고전문학 연구가)

김석배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박인호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참고자료: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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