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엔딩 크레딧 '동성아트홀릭'

1966년 대구생. 경북대 석사. 계명대 언론학 박사
1966년 대구생. 경북대 석사. 계명대 언론학 박사

'조선영화건설본부와 대구영화협회의 공동 주최인 조선해방뉴스 시사회는 2일 오전 11시 부내 만경관에서 각 기관 대표와 5백여 명이 참석 아래 상영하였는데 8월 15일 이후 조선영화인의 참다운 예술정신으로 창작되어 있는 만큼 그 구성, 편집, 녹음 방법에 있어…일반의 호평을 받고 있다.'

해방된 지 두 달여가 지난 1945년 11월에 뉴스 영화인 해방뉴스 시사회를 열었다는 신문기사다. 식지 않은 해방의 기쁨만큼이나 영화 열기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구영화협회는 이후 소련 영화인 '전쟁 후 6시'의 시사회도 연다. 대구영화협회의 회원들은 10월영화공장의 사람들과도 겹친다. 10월영화공장은 해방되던 해 만들어진 대구의 영화사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지향점이 뚜렷한 독립영화사다.

조선해방뉴스의 첫 시사회 장소로 만경관을 잡은 이유는 뭘까. 극장(theater)이나 영화관(cinema)은 엄밀히 따지면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영화나 연극, 악극, 만담, 무용 공연 등을 모두 같은 공간에서 소화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만경관은 일제강점기에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몇 년 뒤 불이나 모두 타버렸고, 대구에서는 유일하게 조선인 전용극장으로 1929년에 다시 문을 연다.

만경관은 1930년대 후반에 식민지 아래 반일 계몽을 통한 영화운동을 펼치는 지역 청년들의 숨 터 역할을 한다. 만경관의 홍보를 맡은 박민천이 '만경관 뉴스'라는 잡지를 내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때다. 영화를 공부한 박민천은 자신의 시나리오 당선작인 '황혼'의 영화 연출에도 나선다. 이는 '만경관 뉴스'가 단순히 홍보잡지 성격이 아니라 영화의 이론과 실무를 다루는 공론장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최근 대구의 예술전용영화관인 동성아트홀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며 '만경관의 청년들'이 떠올랐다. 만경관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전용영화관의 맥을 이어온 배사흠 대표. 소극장을 빌려 예술전용영화관으로 개관한 뒤 지금껏 2천여 편의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상영했다고 한다. 비상업적인 영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시사회를 하고 영화사까지 만들었던 만경관 청년들의 열정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그의 힘만으로 예술전용영화관이 10여 년을 버텨냈을까. 영화를 좋아하다 동성아트홀과 지독한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동성아트홀릭'이다. 커뮤니티에 등록된 회원의 숫자도 숫자지만 참여 열기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라 극장 운영부터 청소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함께하는 동성아트홀의 동반자들이다. 게다가 남태우 프로그래머 등의 힘씀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그런 동성아트홀도 돈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올해부터 영화진흥위원회의 탈 많고 말 많던 지원금이 끊겨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것이다. 지원금이 한 해 운영비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절망의 갈림길에서 '동성아트홀릭'의 바람과 꿈을 되살리겠다는 단비 같은 이가 나타났다. 김주성 광개토병원장이다. 그가 동성아트홀을 맡은 이유 중에는 '동성아트홀릭'의 간절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동성아트홀릭'이 그의 간절함을 채워줄 차례다.

그에게는 영화를 대하는 그만의 품이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자리를 뜨지 말고, 감독이 선정한 마지막 영화음악도 들어봐 달라는…." 그가 이야기하는 마지막 영화음악 뒤에 엔딩 크레딧 하나를 더 달면 어떨까. 어쩌다 힘겨워지면 늘 부활의 힘이 되어야 할 엔딩 크레딧 말이다. '동성아트홀릭' 말이다. 거기까지가 영화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