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 단락 인문학] 벌레가 아닌 그레고르를 만나는 방법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성을 상실한 주인공 그레고르를 통해 인간 소외가 만연한 현대 산업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카프카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이 쓰인 것이 1912년이라고 하니, 벌써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카프카가 벌써 100년 전에 유대감을 상실한 인간 소외 문제를 이야기했으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달라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기대와 달리 우리들의 세상은 조금 더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가볍게 하는 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진지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진지충, 매사에 충실하게 설명해주기를 좋아하는 설명충은 그 사람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특정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베충,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엄마들에 대한 혐오가 담긴 맘충까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한, 많은 벌레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각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그레고르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파브르가 다시 태어난다면 너무나도 기뻐했을(?) 법한, 이런 세상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 아이들이 쓰는 유행어란 너무나도 빨리 바뀌는 것이어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긴 제가 학생 때 쓰던 말들도 생각해보면 벌써 아무도 쓰지 않는 구시대의 말이 되지 않았던가요.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아이들이 쓰고 있는 ○○충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혐오감입니다. 흔히 벌레는 '호'보다는 '불호'에 더 가까운 표현이며 나아가 대상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의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곧 이 말들이 단순히 유행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비하와 혐오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용어가 사람들 사이를 나누고 단절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맘충이라는 용어를 살펴봅시다. 대부분 가정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자식만을 낳아 기르다 보니 자신의 자녀를 지극한 정성으로 키우는 부모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식 예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표현의 방법과 육아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자식만 감싸고도는 부모를 지칭하는 맘충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늘어나는 '노키즈 존'을 보면서 자라나는 새싹이라는 아이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참 슬프게 느껴집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결국 이해와 소통이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소통하였다면 세상이 이렇게 벌레들로 가득하진 않았을 겁니다. 벌레가 아닌 인간의 삶을 살고 싶다면 서로 마음을 엽시다.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할 때, 우리는 벌레가 아닌 진정한 그레고르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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