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인명진 목사

"52% 지지 받고 100% 권력 횡포…진 쪽에도 48% 지분 줘야"

"목사직을 지키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자리를 권유하고 또 수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인명진 목사, 그래도 그는 끝까지 목사로, 또 우리 사회의 '소금'으로 남아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역시 그다웠다. 참여정부 핵심 인물이자 교수인 진행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참여정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거침없이 말했다. 당연히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도 솔직했다. 민주화 운동이 제대로 완결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회한 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한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을 나와 목사가 되었다. 1972년 이후 12년 동안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를 지내면서 노동인권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지내면서 소위 '87년 체제'의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또 당적 없이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내면서 당 대표와 당의 주요 인사들을 징계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대의 소금, 그로부터 그의 인생행로가 왜 '갈릴리'로 향했는지, 또 우리 사회와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듣는다.

김병준: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했으면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물어볼 것이 있다. 부산서 영화 을 보셨더라. 그냥 보신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시사회에 초대를 하셨더라.

인명진: 부산에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동란 때 세운 일산기독병원이 있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인데 이제 호주 선교사들은 떠났고, 출산율은 떨어지고, 노조는 강성이다. 그래서 몹시 어려운데, 이 병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병준: 산부인과 병원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인명진: 출산율이 너무 낮다. 예전에는 살기 힘들어도 아이를 낳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희망이 없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 부산이 특히 그렇다. 출산율이 1.0이 안 된다. 즉 가임여성 한 사람당 1명을 채 낳지 않는다. 그만큼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김병준: 그래서 시사회에 초대도 하셨나? 지금보다 더 힘든 때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명진: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휴머니즘이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전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좀 더 확실히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김병준: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있다. 과거 유신시대에 노동인권운동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옥고도 치르셨고. 그런데 일면 그 시대를 정당화할 수도 있는 영화에 사람들을 초대하셨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인명진: 지금도 농담 삼아 박씨 성 가진 사람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한다(웃음). 그러나 양쪽 다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쪽은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한쪽은 그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인권 유린 등에 항거했다. 한쪽은 산업화를, 또 다른 한쪽은 민주화를 위해 일한 것이다. 둘 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김병준: 그 모진 고생을 하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인명진: 나 자신, 노동인권운동을 하던 다른 분들과 조금 다를 수 있다. 다른 분들이 그 나름의 역사 인식이나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다면 나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부터 출발했다. 운동권이 읽는 사회과학 서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박정희 정권에 대한 생각이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김병준: 종교적인 것이라면?

인명진: 마가복음 이야기인데, 예수 부활 후 그의 측근들이 예수가 어디로 갔는지를 천사에게 물었다. 천사가 대답했다. 갈릴리로 갔다고. 그리고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갈릴리로 오라 했다고.

김병준: 갈릴리?

인명진: 그렇다. 갈릴리가 어떤 곳이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를 따라 갈릴리로 가는 것이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를 바싹 뒤따라가는 것이다."

김병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인명진: 원래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과 소외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학교에 가서도 한때 큰 교회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갖춰진 성가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런데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곳이 있구나."

김병준: 그곳이 곧 갈릴리다?

인명진: 보다 직접적인 계기도 있었다. 전태일 사건 넉 달 뒤쯤 일어난 김진수 사건이다. 여기서 장례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생각을 더 굳혔다. 신학대학원 졸업반 때의 일이다.

김진수 사건은 1971년, 섬유회사가 고용한 깡패가 노조활동을 하던 노동자 김진수 씨를 드라이버로 머리를 찍어 살해한 사건이다. 회사는 물론 노조의 상부조직까지 사적인 다툼에서 일어난 일로 정리하고자 했는데, 그 회사 노동자들과 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그리고 인명진을 비롯한 기독학생들이 격렬히 들고 일어나 바로잡았다.

김병준: 그래서 졸업 후 비누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고, 또 목사 안수 이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를 맡게 되고….

인명준: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유학도 갈 수 있었고, 큰 교회의 부목사로도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성경을 다시 배웠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는 뭐냐? 기독교는 뭐냐?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김병준: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혹독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인명진: 방적 공장 이야기를 하나 하자. 실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여공들은 방적기 사이를 뛰어다니며 일을 한다. 4~5시간 뛰다 보면 사람이 아니라 솜뭉치가 뛰어다닌다. 땀에 젖은 몸에 솜이 달라붙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방적기가 돌다 멎으면 실을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느라 그 시점을 놓치면 실이 헝클어진다. 그러면 작업 끝나고 실을 풀어놓고 가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냥 싼다. 오줌을 싸고 집에 가서 빠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김병준: 이제 그런 일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인명진: 더 나을 게 있나? 그때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렇게 일해서 동생들 대학 보내고, 부모님 약값도 대고…,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런 꿈을 가질 수가 없다. 3포, 5포, 7포, 모조리 포기한다는 이야기만 들린다.

김병준: 그런 점에서 에서의 그 유명한 대사, "그 풍파를 우리 자식들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다행"이라는 주인공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이 든다. 그때는 하다못해 월남도 가고 독일 광부나 간호사로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안 된다.

인명진: 반란이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를 잘못 만나 그런 것이라 여기거나, 일시적으로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김병준: 어려운 자영업자들도, 취업 못 한 젊은이들도 경기가 좋아지면 상황이 나아지려니 한다.

인명진: 과거 노동인권 문제도 그랬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니 당시의 모순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문제가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꾸는 노력을 하게 된다.

김병준: 가장 기본적으로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인명진: 헌정 체계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를테면 양당 구도를 다당제 구도로 바꾸어야 한다. 내각제도 고려해야 한다. 어떻게 52% 받은 사람이 100%의 권력을 5년 동안 행사할 수 있나. 진 쪽에도 48%의 지분을 주고, 또 그렇게 해서 국민의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김병준: 분권적 구도를 제대로 정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참여와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인명진: 당연하다. 지방분권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큰 입법권을 부여해야 한다. 또 지방정당도 있어야 한다. 지방정당 문제는 남북 화해협력과 통일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 없이 북한이 통일에 응하겠나?

김병준: 지금의 헌정 체계나 국가운영 체계로는 될 게 없다. 100% 동의한다. 그동안은 민주화만 되면 뭐든 잘 정리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인명진: 민주화운동 열심히 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열심히 뛰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이 지고지선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아쉽다. 헌법 개정을 정치권에 모두 맡기는 게 아니었다. 결국 국민이 쟁취한 민주화 성과물을 정치인들이 홀랑 말아먹은 꼴이 되었다. 나도 그 속에 있었으니 책임이 크다.

김병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시도한 개혁들은 어떻게 보나?

인명진: 방향이나 정책은 좋았다. 그러나 막상 일을 처리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도 잘못 썼고 현실에 대한 접근도 잘못되었다. 뭘 모르는 학자나 2류, 3류 운동권들이 모두 설건드렸다. 그래서 개혁 대상의 면역성만 높여 놓았다.

김병준: 그때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으셨다. 개인적으로 놀랐다. 어느 당으로건 정당활동은 하지 않을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으로부터의 강청을 못 이기신 건가?

인명진: 그런 점도 있다. 당적을 갖지 않는 것 등, 온갖 요구를 다 했는데 이를 다 들어주며 요청을 해 왔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무능한 진보정부보다 부패한 보수정부가 낫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또 집권할 가능성이 큰 정당에서 소금 역할을 하는 것도 나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김병준: 그렇게 한다고 정당이 바로 서겠나? 또 세상을 바꾸어 내겠나?

인명진: 못한다. 하는 데까지 하는 것이지 정당으로는 세상 못 바꾼다. 그러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정당 그 자체가 잘못된 헌정 체계와 정치 구조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꾸지 못하면 정당도 변하지 않는다.

김병준: 이런 헌정 체제와 정치 구조의 변화를 누가 밀어붙일 수 있을까? 정당은 그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상황이고… 그러면 시민단체는 어떤가?

인명진: 시민단체는 이미 정치화되어 있다. 대중적 힘을 잃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가 이들을 끌어들여 일차 정치화시킨 데다, 박원순 시장이나 김기식 의원 등이 정치권으로 나가면서 재차 정치화되었다. 시민단체 하고 있다고 하면 "당신도 정치할 거야?"라고 묻는 상황이다.

김병준: 또 어떤 집단이 있을 수 있나?

인명진: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종교집단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 집단도 보수화되어 있다.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김병준: 왜 그렇게 되었나?

인명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실망감이다. 분배 문제라도 좀 풀 줄 알았더니 양극화는 더 심각해졌다. 부패 문제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김영삼 두 대통령의 아들, 노무현 대통령의 형 등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똑같은 사람들 아니냐? 민주화가 밥 먹여 주나? 이렇게 되어 버렸다. 여기에 종편이 잘못된 정보와 인식을 계속 심어주고 있다. 뭐가 될 수 있겠나?

김병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해 결성하신 '국민동행' 같은 운동은 어떤가?

인명진: 필요한 운동이다. 그러나 동력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게 걱정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정치지도자들이 새로운 생각으로 움직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 수도 있다. 후계 구도도 마땅치 않고, 또 누가 되어도 안전을 보장 못 하니 내각제 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김병준: 그동안 국가 운영 체계의 변화 없이는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집권을 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면서 늘 누가 대통령이 될까만 이야기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오늘 오랜만에 헌정 체계 내지는 국가 운영 체계의 개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반갑다. 감사하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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