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 함께] 물

# 물

-프랑시스 퐁쥬(1899~1988)

나보다 낮은 곳에, 언제나 나보다 낮은 곳에 물이 있다. 늘 눈을 내리깔고 나는 물을 바라본다. 마치 땅처럼, 땅의 일부처럼, 땅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빛나고, 무정형이고 시원하고, 수동적이나 중력이라는 그 유일한 악에는 철저하고, 이 악을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 에두르고, 뚫고, 녹이고, 스며들면서.

그 내부에서도 이 악은 작동한다. 물은 늘 가라앉고, 매순간 어떤 형태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려고만 하고, 어떤 교단의 승려들처럼 마치 시체와 같이 배를 깔고 땅에 눕는다. 언제나 더욱 낮게-그것이 물의 신조인 것 같다-한층 높게의 반대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물이 내게서 빠져 나가고, 모든 정의를 피해 빠져 나가지만, 내 정신에 그리고 이 종이 위에 흔적들, 비정형의 흔적들을 남긴다.

물의 불안. 아주 작은 경사의 변화에도 민감함. 두 발로 한꺼번에 계단을 뛰어오르면서. 즐겁고, 순종하는 어린이처럼, 이쪽의 경사를 바꾸어 부르면 즉시 되돌아오는 물.

(부분. 『일요일 또는 예술가』. 솔. 1995. 박동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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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말처럼 물은 꿈처럼 헛되어 오직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켜가는 근원적인 운명의 전형이다. 퐁쥬는 사물의 시인이어서(이 시가 실린 원래의 시집 제목은 『사물의 편』이다) 이처럼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동물과 식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물속에서 나오는 방법은 물을 통하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아주 닮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구절을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노자) 다만 노자에게는 '물의 불안'이 없다. 이 '물의 불안'이 정치를 발생하게 한다.

가을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 단풍 지는 사물들 앞에 쪼그려 앉아 그들에게 우리의 무게를 실어보는 것은 어떨까? "모든 것을 단풍들게 하고, 낙엽지게 하자. 침묵의 상태, 옷 벗음, 가을이 다가온다."(「계절의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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