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은 역사 서술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난제를 상기시킨다. 누가 봐도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한 역사 서술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레오폴드 랑케가 '본래 있는 그대로의 역사'라는 역사 서술의 강령을 제시한 이래 어떤 역사가도 여기에 딱 부러지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랑케는 역사는 비당파적으로, 그리고 분노와 정열 없이 냉정하게 쓰일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당하신 말씀 같지만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소리다. 과거의 사실은 무한하다. 이들 전부가 역사 기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기술하려면 과거의 사실들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사관(史觀)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역사가는 역사를 서술하는 바로 그 순간-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본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허구이며 사관에 따라 다양한 역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단일한 사관의 고수나 강요는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놓치거나 은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소련 역사교과서는 이를 입증한다. 마르크시즘과 소련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쓰인 소련 역사교과서는 거짓투성이었다.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승리한 군대는 사실상 소련군뿐이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석유업자들의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고 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아예 빠졌다. 고르바초프의 '개방'으로 이런 거짓말이 드러나자 학생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공식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말도록 했고, 전국의 고교 역사 시험도 없애버렸다. 학생들에게 거짓말 지식을 시험해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론자의 '다양성' 논리는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역사 기술과 해석이 다양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19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 기념 기간 동안 프랑스 역사학계는 대혁명의 원인과 특징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프랑스 교육 당국은 그해 중학교 시험문제에서 프랑스혁명을 빼버렸다.
이는 다양성이 역사 서술에 파멸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다양성은 내 관점이 옳고 상대의 관점에 그르다는 가치판단이 개입되면 무너진다. 그것은 이미 다양성이 아니다. 이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서로 다른 관점, 심지어는 정반대되는 관점이 똑같이 옳다는 인식론적 허무주의에 도달한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의 역사관도 그른 것일 수가 없다.
이런 상대주의는 역사교육도 파멸로 이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면 선택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누가 해야 하는가. 학교인가 교사인가 학생인가. 당연히 학생이어야 한다. 학교가 특정 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학교나 교사의 자의적 선택을 학생에게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이 자의적이라면 학생이라고 선택권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는 역사교육의 무정부화이다.
결국 역사 서술이 다양하기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를 부른다. 그래서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낳을 수 있는 파멸적 결과를 차단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매우 어렵고, 잘못하면 어정쩡한 절충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국정화는 그런 노력을 게을리한 데 따른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정화는 반대론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학생들에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분열과 붕괴를 불러온다. "일정한 공동가치가 없다면 사회는 존립할 수 없다." 에밀 뒤르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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