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도 화가 나면 욕을 했다. 조선시대 왕 중에 막말로는 태종이 정조와 쌍벽을 이뤘다. 왕의 말과 행동은 사관(史官'임금의 행적과 언동을 기록하던 관리)들에 의해 꼼꼼히 기록되었다. 사관들은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수준으로 왕을 따라다녔다. 말실수와 욕설이 잦은 태종의 입장에서 사관은 미운털 박힌 존재였다.
한 날은 궁궐에 큰불이 났다. 태종은 화재로 사책(史冊·실록의 바탕이 되는 기초자료)들이 없어지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치 없는' 한 사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사관은 목숨마저 걸고 사책들을 화마로부터 건져냈지만 태종으로부터 어떠한 칭찬도 포상도 받지 못 했다.
조선의 기록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왕은 사관의 기록물을 열람할 수 없었다. 그렇게 470년 동안 만들어진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은 입이 쩍 벌어진다. 1천893권·888책·6천400만 자에 이르는데 하루 4시간 읽는다고 치면 다 읽는 데 10여 년이 걸린다고 한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 일지 격인 승정원일기의 경우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288년치만 남아 있는데도 분량이 2억5천만 자나 된다.
조선의 백업(Back up) 정신은 웬만한 오늘날 IT업체를 능가한다. 조선은 왕조실록을 4, 5부씩 만들어 전국 네 곳에 분산 보관했다. 필사하는 것이 경제적일 수 있지만 반드시 활자로 인쇄했다. 필사로 인한 왜곡·오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했더라도 전란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실록들은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는 것만 빼고 모두 소실됐다. 전주에 있던 실록 역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질 뻔했는데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 분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 지켜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두 선비는 하인과 말을 동원해 전주로 달려가 실록을 내장산으로 대피시켰다.
우리 기록문화가 낳은 또 하나의 유산인 유교책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가 최근 있었다. 유교책판은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땔감이나 빨래판으로 전락하거나 도난 등 분실 우려가 컸는데, 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가 2002년부터 '목판 10만 장 수집운동'을 펼친 결과 이 같은 결실을 일궈냈다. 임란 때 시골의 두 선비가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것처럼, 국가가 나서야 할 유교책판 보존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지자체와 그 산하기관이 해낸 것에 경하(慶賀)를 보낸다.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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