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난리가 난 것도 아닌데 역사교과서 하나에 온통 시끄럽다. 정치'경제 현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국정(國定)교과서 논란에 모두가 매달려 있으니 과연 옳은 일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근혜 대통령과 현 집권층이 엄청난 자충수(自充手)를 둔 것이라고 본다. 굳이 안 해도 되고, 충분히 보완하고 다듬을 수 있는 일을 덜컥 강행하고 말았으니 이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
이번 논란에 표면적으로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총대를 멨지만, 평소 소신과 발언으로 볼 때 실질적인 지휘자는 박 대통령임을 누구나 안다. 박 대통령이 임기 중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선수나 코치와의 이해 관계자는 심판이나 경기 운영에서 배제하는 것이 원칙인데, 박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이해 관계자다. 박 대통령은 평소 5'16이나 경제 발전과 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이 폄하됐다고 울분을 토로해온 분이니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간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은 일부 진보세력에 의해 폄하된 측면이 있지만, 국민 누구나 알고 있으며 세월이 좀 지나면 더 높이 평가될 것이다. 나폴레옹이나 윈스턴 처칠을 '정신병자' '이기주의자' '권력욕의 화신' 등으로 평가절하하는 책이 숱하게 나왔지만,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위인임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개인적인 분노는 이해하지만, 참고 기다렸어야 했다. 새누리당이 수십, 수백 년을 집권할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이 정쟁의 대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애국심을 강조하는 분이니만큼 남북 관계, '남침' '북침' 따위의 기술에도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올바르지 않은' 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우고 자란 20대들이 반북 성향이 가장 강하고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위정자보다 우리 국민들이 훨씬 똑똑하다.
박 대통령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에 과거보다 더 흉흉한 편 가르기와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은 것 같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유신 미화' '친일 미화' 등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이들은 정치적 셈법에 따라 움직이고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잠재된 위험군은 소위 먹물을 먹은 식자층이다. 이들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 '다양성과 인권'을 신봉한다. 획일화되는 국정교과서를 좋아할 리 없는 계층이다. 이들 상당수는 보수나 진보, 둘 다 싫어하는 무당파층이지만, 이번 사태로 현 정권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이념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식자층의 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된 것이 더 큰 문제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고 분노했지만, 그 대상은 일본에서 출판된 많은 검인정교과서 중 1, 2종에 불과했다. 극우 망동을 서슴지 않은 아베 정권이지만 일본사 교과서를 국정화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의 사례가 어찌 같을 수 있느냐는 반론을 펼 수 있겠지만, 우리가 떳떳해야 남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음은 상식이다.
현재의 한국사 교육이 못마땅하다면 더 단단한 검정 기준을 만들고 소송을 통해서라도 끈질기게 바로잡고 고치면 될 일이었다. 역사니 교육이니 하는 것은 단기간에 승부하고 결론을 내는 영역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임기 말인 2017년부터 졸속으로 만든 국정교과서로 공부할 학생들이 안쓰럽다. 결국 '빈대 몇 마리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 되었으니 현 정권의 미래가 암담해 보인다. 현 집권층의 어리석음과 조급함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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