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박하농사
셋째형의 특용작물 재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굳이 또 하지 말라는 박하(薄荷)농사를 짓겠다니 아버지도 할 말을 잃었다. 말리다가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
셋째형은 합류지에 박하농사를 지으려는 것이었다. 아무도 소유하지 않고 내버려둔 습지였다. 마치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새끼줄 쳐놓고 한 번 물 퍼 가는데 한 냥씩 받듯 하였다. 박하농사를 지으려는 셋째형의 발상부터가 대단하였다.
박하는 11월 중에 종근(種根) 파종이나 이른 봄 3월∼4월초에 파종을 하며, 연 2∼3회 절초를 채취하여 양건(陽乾) 후 규격으로 잘라 팔았다. 박하는 꿀 풀과의 여러해살이 다년생 식물이었다. 저지대 습지를 좋아하고 60∼80cm 정도 자랐다. 빗자루 손으로 박하를 살짝 쓰다듬다 보면 코끝을 시원하게 하는 향기가 났다. 땅속줄기로 번식되어 나가기 때문에 무리지어 자라며 7∼8월이면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셋째형은 박하농사를 하겠다니 '대낮에 등불 들고 다니는 격'이었다. 합류지인 습지 둘레에다가 박하 종근을 심었다. 사래가 하도 길어서 놀라고 말았다. 한 사래를 갔다 돌아오려면 어린아이로서 한나절이 걸릴 거리이었다. 셋째 형은 그곳에 남이 웃을 박하농사를 지었다. 종근이 자연적으로 자라 박하 밭을 이루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습지 백사장에 셋째형만 아는 특수농사를 지었다.
박하는 대개 꽃이 피기 전에 수확하여 박하기름을 짜기 때문에 박하 꽃을 보기 힘들었다. 박하 잎을 살짝 비벼보면 역시 박하향기가 진하게 났다. 박하 꽃이 피기 전에 수확을 하여야 박하기름을 짜서 돈을 벌게 된다고 하였다. 박하를 베어서 동사마을에 쌓아 두었다. 4km 거리를 향기가 진동하는 박하를 베어서 짊어지고 왔다. 박하를 농사지어서 산처럼 쌓아 두고서 기름 짜는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담배농사 때엔 사일로나 발사하기 전의 우주선처럼 생긴 박하기름 짜는 기계에다가 차곡차곡 짙은 녹색 박하를 집어넣었다. 문을 닫아걸고서 밑에다 불을 지폈다. 장작불을 때었다. 불을 피우고 있을 때 사리골댁 어른이 오셨다. 셋째형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이군! 박하 농사 질 지었는가?"
"예. 그저 도랑가에 종자 심어 두었던 것 거둬왔을 뿐입니다."
"내 담배에 박하원액 한 번 묻혀 볼까?"
장작불을 지피고 있는 박하기름 짜는 기계 옆으로 다가섰다. 필터도 없는 막궐련에 지푸라기로 찍어서 원액을 살짝 갖다 대었다. 장작불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폼 나게 막궐련 담배를 한 대 피워보는데 깜짝 놀랄 소리를 하였다.
"아이고! 이군아! 사람 살려! 아니, 이놈의 박하기름이 이렇게까지 독할 줄 몰랐네. 아니 내 똥구멍까지 쐐∼에∼ 하데 이."
사리골댁 어른도 희한한 소리를 하였다. 입으로 담배 피우는데 어찌 자기 똥구멍이 쐐∼하단 말인가? 셋째형 박하농사는 잘 지었다.
21. 담배농사
셋째형은 제대 후 담배농사를 지으면서 고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도 오르고 많은 경험을 하였다. 담배농사는 일이 많다고 해서 동네에서는 아무도 안 하는 농사였다. 식구들 전체가 반대를 하기도 하였다. 어려운 만큼 돈이 된다고 담배농사를 짓겠다고 우겼다. 기어이 담배농사를 지었다.
담배농사는 손이 많이 갔다. 봄에서 겨울까지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농사이었다. 손이 여러 번 가야 상품이 되어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농한기 겨울에도 쉬지를 못하는 농사이었다. 농사 중에서도 장시간 신경 쓰이는 농사였다. 이른 봄에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우는 것부터 어려웠다. 한 포기마다 정성이 들어가야 했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여하튼 양동이에 물을 길어두고, 물뿌리개에 뽀∼로∼록 물방울이 올라오도록 누르고 있어야 물이 찼다. 그 연약한 담배 모종에 물을 주의 깊게 살살 뿌려 주어야 하였다.
포기마다 물을 뿌려주지 않으면 당장 시들어가기 때문에 애처로웠다. 도랑의 물을 퍼서 넓은 담배 밭에 뿌려주기 시작하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을 들고 가서 포기마다 주어야 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포기마다 정성을 들여 돌보면 조금씩 자라서 밭이랑에 푸른빛을 만들었다.
또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뿌려 주어야 했다. 병 예방을 위해 농약도 살포하고, 순치기도 하였다. 다 자라면 노란 빛깔을 띠기 시작하여 밑동에 노란 떡잎부터 차례로 따서 말렸다. 새끼줄에 엮어 '황초 굴'이라 부르는 건조실 안에 매달고 문을 닫은 뒤 장작불을 지폈다. 담배 잎이 노랗게 마르면 새끼줄에서 하나씩 모두 빼내어 창고에 쌓아 두었다. 바쁜 농사를 먼저 하고, 담배농사는 잠깐 잊어버렸다.
겨울이 왔다. 마른 담배 잎을 꺼내어 노란 정도에 따라 분류하였다. 다발로 묶어서 잎담배 수매에 제출하여 좋은 등급을 받아야 수입이 늘었다. 문제는 일련의 담배농사 과정에서 사람을 가만 두지 않았다. 잠깐만이라도 때를 놓치면 상품에서 질이 떨어져 당장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꼼짝없이 일을 제때, 제대로 하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잎담배를 골라다 사랑채에 두고서는 곧잘 말아 비비었다. 담뱃대에 꼭꼭 눌러 재웠다. 수제품 당황(唐黃)을 화롯불에 대면 바로 불을 댕겼다. 대한민국 최고급의 잎담배를 피웠다.
담배농사는 힘이 들지만 잎담배를 결결이 곱게도 노란 빛을 띄우게 해야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다. 덤으로 두둑이 돈을 받을 때는 그 어려운 고생이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담배농사 하는 농부의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셋째형이 군대에서 익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모든 일을 겁 없이 해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덩달아 형제들이 셋째형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모두가 협조하여야 했다. 이로 인하여 깊은 마음의 응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힘든 일을 할 생각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 팽배한 사고는 모두가'안 된다'라고 미리 포기하고 말았다. 농한기철에 화투나 치면서 농사지어 조금 번 돈을 허탕에다 다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먹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부지런히 일할 생각은 조금도 없던 시대에 셋째형은'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던 분이었다.
셋째형의 담배농사는 우리들을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부지런함은 반드시 노력의 대가가 있다는 사실도 증명하였다. 우리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2. 땅콩농사
도시 생활을 하면서 호프집에 자주 들렀다. 예전에는 대구 더위가 전국에서도 제일 더운 곳이었다. 종로술집에 나가면 집에 없던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에 동료들과 시원한 곳에서 얼려 둔 맥주를 마신 것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맥주를 마시면 으레 따라 나오는 기본안주로 땅콩이 있었다. 땅콩은 술도 술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손이 심심하여서 자꾸 속껍질을 벗겨서 하나씩하나씩 주워 곧잘 입 속으로 넣게 되었다.
땅콩은 낙화생(落花生)이라고도 하였다. 낙화생은 식물로서 콩과의 일년초였다. 모래땅에 심었다. 여름 동안 나비모양의 황색 꽃이 피었다. 협과는 자방이 땅 속에서 자라 고치 모양으로 익은 것인데 맛이 좋고 기름도 짰다.
셋째형이 낙화생 농사를 지어 둔 하천으로 가서 수확하자고 하였다. 가족 전체가 모두 동원되었다. 그러나 낙화생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무엇에 받힌듯 하였다. 어떻게 수확하는지도 몰랐다.
셋째형은 태연히 몰고 간 소에다가 쟁기를 매어서 하천 모래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낙화생이라 해서 열매가 바깥에 맺혀 있는 줄 알았다. 마치 고구마를 캐듯이 땅속뿌리에 달리는 열매이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농사를 처음 하는 것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셋째형은 허허허 웃으시기만 하였다.
"낙화생은 땅 속에서 자란단다."
우리들은 처음 알았다. 당시만 해도 낙화생을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고 농사를 지었으니 우리도 참, 우물 안의 개구리이었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달려들어서 양동이마다 낙화생을 따 담기 시작하였다. 순간에 가마니로 열 가마니가 생겼다. 낙화생농사는 처음 지었다.
23. 사과농사
셋째형은 분가하여 직접 농사를 짓지만 논이 없었다. 논 한 마지기 반으로는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내다 팔기에도 바빴다. 논만으로는 많은 식구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2천여 평의 산을 개간하여 채소나 과일나무를 가꾸고 있기는 하였다. 때를 맞추어 중방마을에 도회지 외지인이 투자하여 사과밭을 경영한다는 데 일꾼이 필요하였다. 그 밭을 구입할 때부터 소개도 하였다. 구매하는 데 기여한 덕택으로 사과밭 일을 도맡아서 짓기로 한 모양이었다.
주인이 있는 사과밭 전체를 책임지고 맡아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바빴다. 겨울부터 사과나무 가지치기에 정성을 쏟아야 했다. 봄이 다가 오기 무섭게 사과꽃을 솎아내는 작업은 일시에 많은 일꾼이 필요하였다. 일꾼을 모아서 먼저 교육시켰다. 좋은 꽃만 남기는 것이 기술이었다. 꽃이 조금 자라면 또 적과(摘果) 작업도 하여야 했다. 가지에 너무 많은 과일이 달리면 무거워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오면 사과나무 밑에 풀을 제거하여야 하고, 아울러 병충해 방재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였다.
모든 일들이 계절을 두고 일어나는 일로서 전심전력을 하여야만 남의 사과밭 농사를 망치지 아니하였다. 가을에 붉은 사과를 보면 지나는 촌부부터 아이들까지 붉고 맛나는 사과를 따 먹고 싶어 하였다. 구석진 곳에 원두막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지키기를 하여야 수확이 늘었다.
사과농사는 일반농사와 달라서 계속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가야 하겠기에 봄이면 사과나무 가지에 새 품종의 싹을 구해다가 싹 접목까지를 신경 써야 하였다. 누구나 사과밭에 생산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과나무 밑에 클로버를 심어두었다. 들르는 사람마다 좋은 인상을 주었다. 어느 정도 사과 알맹이가 굵어지면 새나 까마귀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물을 쳐 두는 것도 잊지 아니하였다.
사과밭 농사를 짓는 사람은 일백 번의 손이 가는 농사라고 하였다. 더구나 농약을 칠 때는 상당한 주의를 하여야 했다. 마스크와 두터운 살갗가리개 옷을 덮어 입어야 하였다. 잘못하면 농약의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사과밭 농사도 자기농원이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1년간 사과농사를 짓고 나도 다달이 품삯처럼 받아서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돈을 적게 주더라도 계속 일만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또 셋째형의 입장이고 보니 사과밭 농사일도 어려웠다.
하루하루 사과밭 농사를 어렵게 짓던 중 울산 막내매형께서 여유자금이 생겨서 사과밭을 사려고 하였다. 때마침 셋째형이 일하던 사과밭을 매도한다기에 막내매형이 구입하였다. 울산중앙시장에서 생필품 소매장사만 하다가 사과밭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쉽지 아니하였다. 아예 전담으로 셋째형에게 맡기기로 하였던 모양이었다.
남의 사과밭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셋째형으로서는 매제의 사과농사가 훨씬 일하기에 수월하게 된 모양이었다. 사과밭 아래에 단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채소를 생산하여 팔았다. 수입이 조금 올랐다.
단기채소로서는 짧은 기간에 땅을 이용하는 것으로 여러 품종을 개발하였다. 고추, 참깨, 들깨, 무, 배추, 쪽파, 토마토, 오이 등을 재배하였다. 공한지를 활용하였기에 셋째형에게는 이중 수입이 되었다.
셋째형은 사과밭에 일을 하면서 단기 재배농사도 겸하여 상당한 재미를 보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채소농사로 자립농원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재매의 사과밭이지만 자립의지는 남 못지 아니한 꿈을 그때부터 가지게 된 것이었다.
24. 배꽃가지 달에 반쯤 가린 자립농원
셋째형은 새로움을 발견하였다. 바로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이기에 자립농원을 만들려고 준비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었다. 1960년대 산지개간을 해 둔 2천여 평이 넘는 곳에 장기적으로 배나무를 심었다.
그랬다. 셋째형은 과거 내동이었던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시래 철교를 지나 바로 곁 밀개산에다 배나무 밭을 만들었다. 남의 사과밭 일할 때부터 알았던 것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원두막을 짓는 것이었다. 당장 제재소에 가서 원목 정리를 해주고 폐목을 그냥 얻었다. 기둥과 지붕을 얽고 아버지 목수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원두막 하나 짓기는 쉽사리 만들었다.
원두막에서는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이 북으로 난 창으로 내려다보였다. 밤이면 17번 국도에 울산~경주를 지나는 자동차 불빛으로 꼬리를 무는 것도 보였다. 간혹 동해남부선 기찻길에는 심심찮게 여객차며, 화물기차가 수시로 오르내렸다. 가끔 기적소리도 들었다.
남의 땅, 사과밭지기를 하다가 나의 땅에서 작은 배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최소 5년이 지나야 생산되었다. 그 5년이란 세월에 할 수 있는 것이 단기재배 채소농사였다. 이미 경험해 보았기에 한 평의 땅에서라도 심고 가꾸면 생산하여 돈이 되는 것이었다. 배나무가 자라는 동안 수입이 나올 수 있었다.
채소농사 품종은 고추, 참깨, 들깨, 무, 배추, 쪽파, 대파, 토마토, 오이 등이었다. 두고두고 장사가 잘 되는 것이 파 농사였다. 파 중에서 대파는 시장에 내다 놓기 바쁘게 팔려 나갔다. 덩달아 쪽파도 팔기에는 매우 쉬었다.
아직 작은 배나무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키워 나갔다. 마치 바람 앞에 세운 등불 같았다. 배나무는 낳아 키우는 꼭 자식 같았다. 잡초가 나면 아침부터 매주었다. 작은 배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달덩이 같은 배가 달리는 그날을 기다렸다.
봄이 시작되면서 채소는 무럭무럭 자라고, 배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들깨는 봄부터 잘 자라 주어서 초여름이 되기도 전에 잎을 따 모아 한 움큼씩 묶어 내다팔면 맛있다고 잘 팔려 나갔다. 오이는 옛날부터 농사 잘 지어서 팔아 온 경험도 있었다. 단기성 채소와 장기성 배나무의 궁합을 맞추어 시기를 기다렸다.
농장이 되려면 잘 지켜야 했다. 밤이면 고라니가 극성이었다. 푸른 잎 새싹이 나온 채소를 마구잡이로 뜯어 먹기에 이를 지켜야 했다. 궁한 돈이었지만 철조망을 사다 칠 수밖에 없었다. 철조망 세 겹을 올려 짐승들이 못 들어오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두었다.
원두막에서 밤을 맞아 앉아 있으면 삵인 납닥발이가 눈에 불을 흘리며 철조망 곁에까지 와서 밤새 셋째형을 지켜 주었다. 셋째형은 겁도 없이 납닥발이에게 고마움으로 달래었다.
'우리 배 밭을 잘 지키고, 채소를 보살펴 주시면 큰 딸애 시집보낼 때 쓸 것입니다. 둘째 딸애, 큰 아들 장가도 보낼 것입니다. 부디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납닥발이 영물은 그 말을 알아듣던 말든 혼자서 무섭기도 하였고 축원을 비는 흉내라도 내어 보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 소원을 들어 줄는지는 기다려 보는 것이요, 어느 쯤인가 곁에 있던 그 영물이 사라지고 말았다.
단기성 채소로 수입을 올렸다. 배나무 농사는 장기적이지만 시간을 기다리는 지혜를 미리 터득하게 된 것은 어찌 우연히 얻은 지혜이었겠는가. 궁즉통(窮則通)은 어려우면 통한다고 모두가 가난하기에 살기 위해 얻은 지혜일뿐이었다.
셋째형에게는 배꽃가지 달에 반쯤 가린 배 밭이 조성되면서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중요한 밑천이 될 것을 미리 지레짐작을 한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노력하면 나무는 그 뜻을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 배 밭은 미래 삶의 가장 큰 자산이고 연금(年金)이었다.
▷필자 약력
- 전 영남이공대 교무과장
- 현 'e이야기와 도시' 창작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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