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행복 총량의 법칙

한 달 전, 강의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향하던 중 졸음이 몰려와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캠페인을 하는 팀이 있어 부지런히 무언가를 홍보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이 반복해 외치는 홍보 문구가 그만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버려진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테이블 위에 놓인 수백 장의 어린아이 사진과 함께 들려오는 그 말은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 어린아이들을 누가 버렸냐고, 이렇듯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주문을 외우듯 말할 수밖에 없느냐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분들에게 반문했다. 내친김에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들에게 '버려진 아이'라고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도와주고자 하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그렇게 부른다면 성장하는 동안 이 아이들은 '나는 버려졌구나. 부모님과 사회가 나를 버렸구나. 나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부탁했다. '버려진 아이들을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해 주세요'란 말로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요즘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유명 연예인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TV를 통해 낱낱이 들여다보며 재롱에 감탄하고 행복해 한다. 반면 가까운 어딘가에서는 그것을 지켜보며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에 상처를 받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혜택을 받은 아이들은 국민 모두가 사랑을 주지 않아도 주변의 넘치는 관심과 사랑이 늘 함께할 것이다.

청소년 교도소에 강의를 갈 때면 늘 마음 한쪽이 씁쓸히 아파온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순수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죄수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내가 찾은 한결같은 느낌은 바로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이라는 기초체력이 없으니 아이들은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버려졌다'는 말은 아픈 말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평생 들으며 살아가야 될지도 모를 주홍글씨다. 처음 맞는 세상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인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가 '버려진 아이'가 아닌 '발견된 아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고, 한 번의 스치는 눈빛이라도 사랑이 담긴 것일 수 있다면,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라 믿는다.

최인호 유고집 '눈물'의 한 소절을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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