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은 길재, 구미에 은거 세상을 비추다] 3)가는 길 달라도 끝까지 서로 존중

고려·새 왕조 '엇갈린 선택' 스승 권근에 변치않는 신뢰

야은 길재 선생은 어린 시절 구미의 도리사에서 공부했다. 사진은 보물 제 470호인 도리사 석탑
야은 길재 선생은 어린 시절 구미의 도리사에서 공부했다. 사진은 보물 제 470호인 도리사 석탑
도리사에 있는 태조선원. 야은 길재선생이 유년 시절 공부한 요사채이다
도리사에 있는 태조선원. 야은 길재선생이 유년 시절 공부한 요사채이다
구미시 도량동 율리 마을 야은 길재 선생 영당 주변에 길재 선생이 심어놓았다는
구미시 도량동 율리 마을 야은 길재 선생 영당 주변에 길재 선생이 심어놓았다는 '야은 죽(대나무)'이 있다.
야은 길재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전경
야은 길재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전경

길재는 18세에 개경에 간 뒤 줄곧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이때 이성계의 어렸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만나게 된다. 이방원(1367~1422)은 길재보다 14살이 더 적었고 31세 때 사마감시에 급제한 길재보다 1년 앞서 16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형제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인 이방원은 야심만만하고 총명한 인물로 아버지를 도와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되며 나중에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 3대 태종 임금이 된다. 길재는 이방원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공부를 해 두터운 정을 쌓았으며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곤 했다. 이방원은 길재의 바르고 강직한 됨됨이와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에 감복하고 존경하는 마음마저 갖게 됐다. 길재도 자신을 따르는 이방원을 동생처럼 아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달라서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길재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2년 후인 1390년에 3년간의 짧았던 관료 생활을 접고 구미로 낙향했고 이방원은 2년 뒤인 1392년에 심복들을 시켜 포은 정몽주를 격살하였다. 그 해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세워졌다. 고향에 파묻혀 살던 길재에게도 이 소식들이 전해졌으니 그의 비감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예전에 아끼던 후배가 존경하는 스승을 죽이고 자신이 반대하던 새 왕조의 주역이 되었으니 사람 간 맺은 관계와 세상사 돌아가는 형국이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길재는 초야에 묻혀 비통한 마음을 추스르며 살았고 피바람을 일으키던 이방원도 길재와의 옛 정리는 잊지 못해 그만은 다치지 않게 했으며 때때로 그를 가슴에 떠올렸다.

길재는 개경 시절,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 당대의 석학들과 만나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색은 길재보다 25년 먼저 태어난 인물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하륜 등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고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 삼년상을 제도화했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친명 정책을 지지하면서 고려 왕조를 지키는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길재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 이색을 찾아가 하직 인사를 드렸고 이색은 그의 낙향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이색은 이성계 세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삶의 말년에 여러 차례 유배를 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그의 인품과 식견, 관료로서의 능력을 애석하게 여겨 출사를 종용했으나 이색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왕조 개국 4년 만인 1396년에 숨을 거뒀다.

이색의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선택을 하거나 다른 길을 갔다.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은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성하고자 했고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은 조선 개국을 돕는 길을 선택했다. 길재는 열여섯 살 많은 정몽주와 한 살 많은 권근을 스승으로 모셨다. 길재는 이들을 통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학문에 정진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정몽주보다는 권근과 더 가깝게 지냈다.

나이 차이가 거의 없지만 길재는 권근을 스승으로서 깍듯이 모셨고 권근 역시 길재를 무척 아꼈다. 권근은 "내 뒤를 이을 학자는 몇 있을 터이지만 길재부(再父:길재의 자)가 독보(獨步)다"라고 할 정도로 길재의 출중한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스승 권근, 길재와 달리 새 왕조에 참여

그러나 권근은 길재와는 달리 조선 왕조에 참여하는 길을 택했다. 정치가로서 은둔하기보다 새 조정에 참여하는 길이 옳다고 보았고 이를 합리화했다. 1393년에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 아버지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권근은 1396년에 발생한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 속 표현이 불경스럽다고 트집을 잡아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고 명나라에 가 조선과 명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대사헌, 예문관 대제학 등을 거치며 사병 제도를 혁파, 왕권 확립에 기여하였고 왕명을 받아 하륜 등과 함께 '동국사략' 등을 편찬했다. 뛰어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 관료로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부귀영화의 삶을 살아 불사이군의 청빈한 삶을 살았던 길재와는 뚜렷이 대비됐다.

길재는 권근이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지만, 그에 관계없이 권근을 끝까지 스승으로 모셨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것이었다. 길재가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듯이 스승에 대한 예의도 같은 것으로 여겼다.

역사적 흐름으로는 고려 왕조가 수명을 다하고 새 왕조의 등장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상황이었다는 점을 길재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그 자신은 고려 왕조의 신하이기 때문에 새 왕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길재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권근 역시 그러해야 하나 그러지 않았고 길재는 자신의 스승이 내린 결정을 비난할 수 없었다.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더라도 스승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길재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길재는 스승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비난하지 않았다. 원래 청렴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녔던 데다 세상의 변화를 하늘의 이치로 받아들이되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면 되지, 굳이 남을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보았던 듯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 속에 묻혀 담백하게 살면서 세속적 욕구에는 초연하고자 했다.

권근은 이러한 길재를 높게 평가했다. 길재가 관료로서 뜻을 펴지 못하고 출중한 재능을 묻어두는 점을 아쉬워했지만 그의 삶이 조선 관료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준 점을 고마워했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 남재(南在)가 길재의 가난한 삶을 염려해 가묘(家廟)를 지어 드리자 서문을 써서 길재를 칭송했다.

'고려 오백 년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하던 효과가 선생의 일신에 모여 거두어들이고 조선 억만년에 강상을 부식하여 신하의 절개를 밝힐 근본이 선생의 일신에서 터가 잡혔으니 풍교에 유공함이 이만큼 크며 우리 성왕의 덕이 또한 선생으로 말미암아 더욱 드러났으니 진실로 백대를 격동하는 높은 정신이요 만세를 보전하는 방파제다'라고 하였다.

◆가는 길 달랐지만, 끝까지 서로 존중해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던 두 사람 중 권근이 1409년에 58세로 별세하자 길재는 "옛날에는 백성이 군'사'부 아래에 살았으므로 꼭 같이 섬겼는데, 지금은 군'부를 위해 상은 입어도 스승을 위해서 상을 입는 사람은 없다"라고 탄식하면서 마음속으로 삼년상을 입었다. 그만큼 마음속으로 권근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할 수 있다.

길재는 권근뿐만 아니라 다른 스승들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예를 다했다. 이색이 별세하자 마음속으로 삼년상을 입었고 어린 시절 첫 스승이었던 박분이 1417년에 작고하자 역시 마음속으로 삼년상을 입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당시에는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길재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한 몸같이 보고 충성하고 효도하는 성리학의 가르침과 유교 방식인 주자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렀다. 자신이 섬기던 고려 우왕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에도 삼년상을 지내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길재의 스승이었던 정몽주는 경북 영천 사람이다. 정몽주는 유교 경전에 밝아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쳤고 연구를 더해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길재는 정몽주의 가르침을 이어 2대 계보를 이루면서 영남 사림 학맥을 일궈냈다.

이들의 스승이었던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경북 봉화 출신으로 다섯 살 아래 후배였던 정도전도 정몽주를 두고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심을 나타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그들은 나중에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이 되고 말았다.

정몽주는 이성계, 정도전 등과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다 고려 왕조의 존폐를 두고 갈라섰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도 찬성했으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 왕조를 열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개혁은 해야 하되 고려 왕조는 지켜야겠다는 것이 정몽주의 생각이었다.

결국,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선지교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길재는 정몽주의 죽음을 전해 들은 뒤 슬퍼했으며 정몽주와 권근 등의 가르침을 이어 고향 구미에서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권근은 조선 새 왕조를 지키려면 자신과 다른 길을 갔던 정몽주와 길재 같은 인물이 사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들을 칭송했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

도움말:길화수 (사)금오서원보존회 부이사장(야은 길재 17대 종가손)

이택용 경북정체성포럼 선비분과위원(고전문학 연구가)

김석배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박인호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참고자료: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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