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한 손엔 악보를, 한 손엔 맥주를

매월 첫째 주 화요일 이른 저녁, 안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합창을 한다. 참가 자격이나 연령제한도 없다. 한 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 동안 하나의 곡을 '완주'하는 것이 공동의 목표이다. 간단한 절차를 거친 후 악보와 맥주를 챙겨 자리에 앉으면 연습이 시작된다. 모르는 사람들과 목소리를 섞어야 한다는 어색함은 다행히 맥주로 중화가 된다. 눈치를 보아하니 개중 몇몇은 심지어 악보조차 읽을 줄 모르는 '음맹'인 것 같다. 대부분 아마추어 중에 아마추어이지만 이 사람만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바로 지휘자이다. 악보를 보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전달해 준 그는 난해한 음악적 용어 대신 손짓, 몸짓, 그리고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다. 파트별 연습이 진행되고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과정 내내 '배려'와 '신뢰', 그리고 '행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왜곡된 형태로 유전자 전의를 거듭한 '경쟁 바이러스'가 수세대를 거쳐 정신의 가장 깊은 면역체계까지 침투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대신, 밀어내고 끌어내리는 데 익숙해졌다. 들어주고 공감하는 대신, 주장과 요구만 남아 있다. 나누고 베푸는 대신, 제 것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체면이나 격식, 품위와 명예 따위는 '위인들'의 무덤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만연해 있는 사회적 상태를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표현하자면 '절망'이다. 그런데 절망 중 가장 큰 절망은 절망하고자 하는 본능조차 퇴화된 상태이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절망하고자 하는가? 의지적 절망의 또 다른 말은 '절박함'이다. 절박함의 상실 그것이 절망의 또 다른 실체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하지만 행복하고자 하는 절박함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사회가 건전하게 작동하려면 개개인이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한 컵의 시원한 물, 한숨의 신선한 공기와 같다. 행복은 삶을 구성하는 기본 조건이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정말 행복하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성장이 아닌 성숙, 경쟁이 아닌 공존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이 필요하다. 이뿐만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은 배려와 소통을 통해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고 바람직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제 목소리를 키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을 앉혀 놓고 지휘자가 진땀을 뺀다. 서로를 낮추고 서로를 끌어주는 합창. 맞을 것 같지 않던 화음이 기적처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음색으로 어우러진다. 합창의 본질은 배려와 신뢰였고, 그렇게 행복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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