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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 산책] 울적한 걱정일랑 내일 가서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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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함을 풀다-나은

잘 풀리면 노래하고 안 풀리면 할 수 없고

근심 많고 한 많아도 느긋할 뿐이라네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퍼마시고

내일 할 근심일랑은 내일에나 근심하세

得則高歌失則休(득즉고가실즉휴)

多愁多恨亦悠悠(다수다한역유유)

今朝有酒今朝醉(금조유주금조취)

明日愁來明日愁(명일수래명일수)

*원제: [遣悶(견민)]

"좀 다급한 일이 있어 후닥닥 나갔더니/ 앞집 아가씨의 뒤태가 보였는데/ 이십 층 승강기 문이 그만 왈칵 닫힌다// 어찌할 수가 없어 한참을 기다리다/ 내려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 하니/ 열쇠를 안 가져 왔다, 우와 이거 열 받겠다/ 돌아가니 승강기는 이미 올라가고 있고/ 돌아오니 승강기는 이미 내려가고 있고/ 돌아온, 승강기 타니, 층층마다, 다 선다// 신호등도 하필이면 붉은 등에 죄다 걸려/ 천신만고 끝에 학교에 도착하니/ 이번엔 연구실 키를 입던 옷에 두고 왔다."

졸시(拙詩) '야호!'의 일부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목구멍에 술이 술술 넘어가듯 만사가 술술 풀릴 때도 있지만, 하는 일마다 꽈배기를 트는 경우가 더 많다. 하는 일마다 용케도 풀리는 신바람 나는 인생도 있지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지는 설상가상의 인생도 있다.

당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인 나은의 인생도 엎친 데다 덮친 인생이었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시인이었지만, 엄청 못생긴 남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를 몹시도 좋아하여 노상 읊조리던 재상의 딸이, 나은의 모습을 한 번 본 후로는 그의 시를 읊는 것을 딱 끊어버렸다고 하니, 나은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나은의 시에는 정권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은 것이 많았고, 재주를 믿고 남에게 오만하게 구는 성격상의 결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10여 차례나 과거에 떨어져서 '나은지한'(羅隱之恨: 과거에 계속 떨어진 한)이라는 고사성어까지 후세에 남겼으니, 이만하면 그의 삶도 울적한 삶이 아니라고 하기가 어렵지 싶다.

위의 시는 바로 그 울적함을 풀기 위해 지은 작품이지만, 그 울적함이 제대로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보아하니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철도 들 만큼은 다 들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도 이제는 드디어 알 만하게 되었다. 젊은 날의 오만함도 다 삭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잘 풀리면 노래하고 안 풀리면 할 수 없고, 근심 많고 한 많아도 느긋할 뿐이라네"라는 구절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체념과 달관 중에 어느 쪽인지가 정말 아리송하다. 하기야 그것이 달관이면 어떻고 체념이면 또 어떻겠는가. 마실 술이 생겼으면 오늘 당장 통쾌하게 취하고, 내일 근심일랑은 내일 가서 하는 것도 이 험한 세상을 넘어가는 눈부신 지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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