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진눈깨비

# 진눈깨비

-강성은 (1973~ )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사람들은 박물관의 공룡들처럼 텅 빈 몸을 가진다

영혼이 스친다는 건 무슨 말일까

며칠째 쌓였던 눈이 녹자 옆집 지붕이 검게 변한다

하얀 얼룩이 사라지자 검은 얼룩이

검은 얼룩이 사라지자 다시 하얀 얼룩이

이 계절 내내 번져간다

어떤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자신을 본다

새들도 페루에 가서 죽는다는 말이 사실일까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겨울과 입 맞춘다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가난과 입 맞춘다

딱딱한 물을 나눠 먹자며 수시로 겨울은 창문을 두들겼다

겨울에 태어난 자들은 겨울이 나눠주는 물을 먹고

부러진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한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먹었다

(전문.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 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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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이라는 글에서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소진은 이중적이다. 소진은 모든 가능성과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절망의 상태이거나, 새로운 생성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무(無)의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하기 바로 전의 상태이다.

이 시는 그러한 소진의 인간을, 그 소진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텅 빈 몸'의 '사람들은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가난과 싸우며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다. 흔히들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가 정책의 혼란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더 본질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얼룩'은 수시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더럽힌다. 청년과 비정규직과 노년의 슬픔은 가능성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구조적 소진의 결과다.

그러나 소진은 단절과 무(無)라는 점에서 새로운 생성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생성을 위해 우리는 '부러진 이'로 휘파람을 분다. 또한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먹"기도 한다. 진눈깨비 같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의지만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능의 가능성이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를 통해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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