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면은 비슬산 북쪽 지맥 가창, 화원, 옥포, 논공의 경계지점을 출발, 천왕봉 능선을 따라 조화봉 관기봉을 거쳐 창녕군 성산면에 이른다, 또 청도군 각북, 풍각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산맥의 서쪽 기슭을 따라 형성된 지역이다.
유가면은 북부, 중부, 남부 등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현내들 가운데로 현풍, 구지면과 경계를 이뤄 학교, 시장, 병원 등의 생활 근거지는 현풍이다. 현풍면소재지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3㎞ 지점에 차천 마을이 있고, 차천은 현풍의 원교리, 유가의 유곡리, 구지의 가천리 등 3개 면 3개 리가 합쳐진 마을이다.
유가면에는 음리(陰里), 양리(陽里), 용리(龍里), 봉리(鳳里), 쌍계리(雙溪里), 초곡리(草谷里), 상리(上里), 금리(琴里), 유곡리(油谷里), 도의리(道義里), 가태리(佳泰里), 한정리(寒亭里), 본말리(本末리) 등 13개 법정리와 20개의 행정리가 있다.
◆당나라 황제가 찾은 비슬산 대견사
유가면 용리의 비슬산은 산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라 때 인도 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감탄하여 '비슬'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대 인도의 신 '비슈누'(Vishnu)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 한자로 표기한 '비슬노'(琵瑟怒)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슈누는 '덮는다'라는 뜻이 있어 이를 한자로 쓰면 포(包, 苞)가 되어 지금도 포산(包山, 苞山)으로 쓰이곤 한다. 또한 일연은 '삼국유사'에 주(註)를 남겨 '그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불렀다'고 적고 있다.
'소슬'(솟을)은 '우뚝하다' '높다'라는 것이니, 비슬산은 '우뚝하니 높이 솟아 주변을 끌어안고 덮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는 뜻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비슬산, 포산, 소슬산은 같은 의미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비슬산의 3봉(峰)으로 불리는 대견봉(大見峰)과 조화봉(照華峰), 관기봉(觀機峰)은 저마다의 전설을 갖고 있다. 대견봉은 신라 때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는데 대야 물속에서 험한 지형에 웅장한 절(寺刹)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본 데서 유래됐다.
당나라 황제가 중국 곳곳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자 이웃인 신라에 사람을 보내 찾은 것이 바로 비슬산 대견사지였다. 황제가 신라에 돈을 보내 절을 짓게 하고 중국에서 보았던 절이라고 해 대견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대견봉 남쪽의 조화봉은 대야 물속에 대견사와 함께 중화(中華)까지 비쳤다는 뜻으로 조화봉으로 불린다.
◆비슬산의 관기와 도성 이야기
일연의 삼국유사 권5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시대에 포산에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명의 성사가 있었는데, 어느 곳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 속에 살아 서로 10리쯤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매일 서로 오갔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 구부러져 서로 맞이하는 형상을 하여 관기는 그것을 보고 도성에게 갔고,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고 하면 역시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이 관기에게 가게 됐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났다. 도성은 늘 그가 살고 있는 뒷산의 높은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바위틈에서 몸이 솟구쳐 나와 온몸이 공중으로 올라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수창군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관기도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지금은 두 대사의 이름으로 그 터의 이름을 삼고 있는데 모두 터가 남아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세웠다.
태평흥국 7년 임오년(982년)에 승려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 머물면서 만일미타도량을 열고 50여 년 동안 부지런히 도를 닦았는데, 여러 차례 특이한 조짐이 있었다.
이때 현풍에 사는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다. 그들은 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거두어 쪼갠 다음 씻어서 발 위에 펼쳐 두었는데, 그 나무는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났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그 향나무에 시주하고 빛을 얻은 해를 축하했다. 이것은 성인된 산신령이 도운 것이라고도 한다. 산신령의 이름은 정성천왕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 명명된 터가 있었다고 한다. 후인들은 도성이 좌선하던 굴 아래에 절을 지어 도성암, 관기가 있던 산마루는 관기봉이라 했다.
도성암과 관기봉 사이에는 억새와 칡이 눈에 띄지 않는데 사연은 이렇다. 어느 달 밝은 밤 도성이 관기를 만나러 가는 길에 산골짜기에 피어난 억새숲을 오인한 나머지 혹시 자기를 찾아오는 관기인가 싶어 달려갔다. 그러나 관기가 아니고 억새숲이었고 그곳에서 그만 길을 잃고 무성한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등 고생을 했다.
그 바람에 도성은 평시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관기에게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유를 들은 관기는 도성과 의논 끝에 비슬산 신령에게 밤길을 오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억새와 칡을 모두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부터 비슬산 봉우리에는 억새와 칡이 자라지 않게 되었고, 지금도 이곳의 억새는 줄기만 무성하고 꽃은 피지 않으며 칡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달빛 밟고 서로 오가는 길 구름 어린 샘물에 노닐던 두 성사(聖師)의 풍류는 몇 백년이나 흘렀던가/ 안개 자욱한 골짜기엔 고목(古木)만이 남아 있어/ 뉘었다 일어나는 찬 나무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
'포산이성'이 떠나고 700년 뒤 일연은 포산이성의 자취를 찾아 도성암에서 며칠을 머물며 '찬 포산이성 관기 도성'(讚 包山二聖 觀機 道成)을 지어 삼국유사에 남겼다.
◆사효자굴의 슬픈 전설
유가면 양리에 사효자굴이 있다. 사효자굴은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의 사촌 동생인 재훈(再勳)의 네 아들 결(潔), 청(淸), 형(泂), 호(浩)가 임진왜란 당시 병중인 아버지를 모시고 피란 중 왜병에게 발각되어 대신 목숨을 바친 사연이 깃든 곳이다.
유가면 쌍계리에 살고 있던 곽 노인의 네 형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쳐들어오자 일가족은 비슬산에 있는 한 동굴로 피신하였다. 며칠을 근근이 숨어 있었으나 왜병들이 곽 노인 일가족 5명이 숨은 굴을 지나는 순간 천식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기침을 하여 마침내 발각되었다.
왜병들이 기침 소리가 나는 동굴을 향해 나오라고 소리치자 맏아들 결이 걸어나가 자신이 혼자 동굴 속에 숨어 있었노라고 말하고 왜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아들을 죽이고 이젠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가려는데 기침 소리가 계속해서 나자 왜병이 다시 소리쳤고 이에 아들들은 차례로 아버지를 대신해 목숨을 잃었다.
형제가 차례로 죽고 끝내 아버지가 발각되자, 곽 노인은 이미 죽은 네 사람은 자기의 아들이며 기침으로 발각되어 자기가 나오려 할 때마다 아들들이 대신해 칼을 맞은 것이란 설명을 했다. 왜병들은 자기가 죽인 네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죽은 것을 알고 효심에 감탄, 곽 노인의 등에 '차인효자지부 후인물해'(此人孝子之夫 後人勿害'이 사람은 효자의 아버지이니 해치지 말라)라는 글을 써주고 무사히 피란하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일이 전해진 뒤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사효자굴'이라 칭하고 현풍 곽씨의 후손들은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에 이들 형제의 사연을 기록했고, 지난 62년에는 굴 옆에 효자비를 세우는 등 형제의 효심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유가면 양리 마을을 지나 내를 따라 오르다가 왼편으로 바위가 쌓인 비탈을 조금만 오르면 큰 바위들 속에 사람 몇이 숨어 있을 만한 굴이 있다. 사효자굴이다. 돌이 겹겹이 겹쳐져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이다.
이곳은 그동안 칡넝쿨과 잡풀이 무성하게 덮여 방치되어 있었으나 달성군에서 2010년 새롭게 단장했다. 안내간판을 세우고 굴 입구부터 계단을 설치하여 접근하기 쉽게 해놓았으며 주위에 폭포가 있고 개울이 좋아서 겸사겸사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홍의장군의 기세가 서린 초곡산성
유가면 초곡리의 초곡산성에는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곽재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풍읍지에는 초곡산성 '과녀성'(寡女城)으로 기록돼 있다. '삼국시대 때 한 과부가 분연히 의를 세워 성을 쌓아 적을 방어했다'(三國相爭時一寡女奮義築城禦賊兵之)는 것이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죽자 남은 과부들이 주축이 되어 성을 쌓았다는 의미다.
초곡산성은 인근에 위치한 동네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한 마을에서 보면 소가 누운 형상이라 해서 '와우(臥牛) 산성'이라 했다. 산 모양이 개구리를 닮았다 하여 '와와(臥蛙) 산성'이고, 양리 사람들은 '양동(陽東) 산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홍의장군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초곡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이 성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오는 왜군들의 통로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왜군들은 육로로도 올라왔지만, 낙동강을 따라 배로도 올라왔다.
왜군들을 겁주기 위해 홍의장군은 꾀를 냈다. 초곡산에서 낙동강을 낀 대니산까지를 길게 줄로 이어서 허수아비 장군을 매달았다. 거대한 허수아비 장군은 홍의장군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두 산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이를 본 왜병들은 크게 겁을 먹었다.
초곡산은 개구리가 뛰는 형국이어서 뒤가 낮고 앞이 높다. 그러니 뒤에서 공격하면 쉽게 올라올 수 있어서 함락하기가 용이했다.
그러나 왜군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앞으로만 보고 무작정 들이닥친 왜군들은 헉헉거렸다. 지형지물이 유리한 홍의장군의 군대는 돌을 아래쪽으로 굴리고 화살을 쏴 댔다. 결국 왜군들에게 '대패'라고 할 만큼의 위협을 가한 홍의장군은 이때부터 기세를 모아 가는 곳마다 대승을 거두는 공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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