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뱃놀이와 물 전쟁

'황지의 못에서 발원하여/…/큰물이 60고을을 나누니/도처에 나루터며 돛대도 연이었구나/바다까지 곧바로 400리 길/바람 따라 장사치 오르내린다/…/남도 백성 가렴주구 어이 견디랴/쌀독은 진작 비고 밤 도토리도 없건마는/뱃전의 풍악소리 살찐 소 때려잡네/서울서 온 관리 유성처럼 지나가니/길가의 해골들 누가 성명이나 물어보리/…/하늘의 백구는 나를 비웃는 듯/한가롭게 훨훨 날아다닌다.'

아버지 김숙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선산지리지'와 '선산 10절' 등 고향 경북 선산에 대한 글을 남긴 점필재 김종직의 '낙동요'다. 낙동강을 오가는 장사배와 부패 관리들, 힘겨운 백성의 삶을 그렸다. 낙동강은 고대부터 문화 전파로이자 상거래, 교류의 통로였다. 고령 낙동강변 등에 남해안 조개는 물론 일본 조개까지 발견되는 이유다. 낙동강은 또 고려 말과 조선조 왜구 노략질, 일제 식민시절 우리 물자 수탈과 반출 창구였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낙동강은 유학자의 뱃놀이 터였다. 낙동강 사이에 좌도(퇴계학파)와 우도(남명학파)로 나눠 여러 학파가 생기면서 '선유'(船遊), '주유'(舟遊)라는 뱃놀이로 스승과 제자, 친구 간 사교와 소통, 유대의 고리로 삼았다. 예안과 안동, 상주, 선산과 인동, 대구와 성주, 고령, 창녕, 함안, 밀양, 김해 등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많은 뱃놀이가 이뤄졌다. 뱃놀이 주변은 절경에다 정자, 서원 등이 즐비했다. 강을 낀 집단놀이라 늘 시, 글이 함께 했다.

점필재 문인의 상주 '낙강범주', 이황 문인의 예안 '풍월담선유', 한강(정구)과 여헌(장현광) 문인의 '영귀정범주' '금호선사선유' '낙강선유' '용화선유' '봉산욕행' 등 숱하다. 75세 한강이 45일간 치료 나들이를 겸한 온천행인 '봉산욕행'의 경우 칠곡에서 동래 온천까지 물길 710리, 땅길 20리의 대장정이었다. 뱃길과 뭍길에서 만난 사람 300여 명 중 자신의 문인만도 기록(342명)의 25% 가까운 80여 명에 이르렀다. 더없는 교류, 소통, 유대였다.

바로 그 낙동강에서 24일 대구 시인과 춤꾼, 국악 연주자 등 문화 예술인이 달성 사문진의 유람선 '달성호'로 옛 선유를 재현했다. 이를 통해 이제 산업화의 젖줄이 된 낙동강의 옛 정취도 살리고 아울러 낙동강으로 인연 맺은 이웃 간 교류와 소통, 유대의 고리를 복원할 방법은 없을까? 낙동강 취수원 문제로 대구와 구미가 지금 치르고 있는 상처뿐인 '물 전쟁' 갈등도 달성호의 낙동강 범주(泛舟)로 풀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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