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2> 창녕 화왕산

카페트처럼 출렁이는 하얀 억새 물결

엄홍길 대장이 23일 화왕산에서 등산객들과 함께 억새밭길을 걷고 있다.
엄홍길 대장이 23일 화왕산에서 등산객들과 함께 억새밭길을 걷고 있다. '엄홍길과 함께하는 16좌' 2차 산행인 화왕산 산행에는 전국에서 1천여 명의 산행객들이 참석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화왕산 정상에서 엄 대장과 인증샷을 찍고 있는 등산객들. 이채근 기자
화왕산 정상에서 엄 대장과 인증샷을 찍고 있는 등산객들. 이채근 기자

억새와 인간의 가을 판타지? 억새는 수정을 위해 꽃낭을 밀어올린다. 즉, 외피(外皮)를 뚫고 나오는 수술은 번식을 위한 자연현상인 것이다. 사람들도 가을엔 계절을 탄다. 갑자기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 산객들은 세로토닌 작용에 이끌려 산을 오른다. 가을 억새 산은 식물 종(種)의 번식 행위와 인간의 감성적 심미(審美)가 만나는 곳이다. '엄홍길과 함께하는 16좌'에서 이번 달엔 인간과 자연의 절묘한 이중주가 펼쳐지고 있는 창녕 화왕산을 다녀왔다.

◆역사'자연경관 어우러진 인문학의 보고

23일 '엄홍길 산악원정대'는 창녕에 모였다. 화왕산 등반을 위해 전국에서 관광버스 40여 대가 옥천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광장을 메운 등산복 물결이 벌써 절기가 가을 한복판으로 들어왔음을 알리고 있다.

울주 신불산, 양산 천성산, 밀양 천황산과 함께 영남 4대 억새 명산으로 불리는 창녕 화왕산은 역사와 유적, 자연경관이 잘 어우러진 인문학의 보고로 통한다. 산성을 둘러싼 20㏊(6만여 평)의 대규모 억새밭은 규모나 질(質) 면에서 억새 명산의 맨 앞에 놓아도 부족함이 없다.

지난 1997년 화왕산을 찾았다 억새에 반해 한동안 가을 앓이를 했다는 오미자(61'전북 남원) 씨는 "이번에 밀레(아웃도어 업체)에서 창녕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산행 신청을 했다"고 말한다. 이날 산행 코스는 옥천리 주차장에서 임도를 걸어 허준 세트장, 동문을 거쳐 정상을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로 진행됐다.

◆히말라야 연봉(連峰)에도 가을 절기 뚜렷

"히말라야에도 가을이 있나요?" 산행 전에 엄 대장에게 살짝 물었다. '그럼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겨울왕국' 네팔의 연봉에도 가을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달력의 구분이 아닌 절기로서의 가을이다. 네팔의 가을은 일반적으로 9월에서 11월 사이. 기간도 비슷하지만 기후 조건도 유사하다. 한국 등반객들의 원정이 이 시기에 집중된다. "제16좌 등정의 상당수가 가을에 이루어졌어요. 1988년 에베레스트, 초오유부터 시샤팡마, 로체, 마나슬루를 전부 가을에 올랐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을 제 가슴에 묻었지만…." 물론 단풍이나 억새 같은 낭만, 분위기는 없고 단지 덜 춥고 기상이 좋아 등정이 쉽다는 계절적 편의만 있을 뿐이란다.

◆6만 평 억새 물결에 감성 모드로

옥천리 매표소에서 허준 세트장~동문까지는 임도로 연결돼 걷기에 크게 부담은 없다. 파스텔톤으로 물든 옥천계곡을 끼고 2시간을 꼬박 올랐다. 세트장을 지나 드디어 동문에 들어섰다. 산성에 접어들자 하얀 억새밭이 카펫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역광을 받아 빛을 한껏 머금은 억새는 중력에 몸을 맡긴 채 하얀 물결로 일렁인다.

일행은 엄 대장과 보폭을 맞추며 서문으로 향하는 길로 곧장 나아갔다. 곱게 빗은 여인의 가르마 같은 억새길을 걸으며 다들 가을 감성에 빠져든다. 상기된 채로 묵묵히 걷기만 하던 엄 대장도 상념에 겨운 듯 툭 한마디를 던진다. "한 기자, 지퍼 좀 열고 휴대폰 좀 꺼내줘." 그러고는 배바위 쪽 억새 풍경을 그의 카메라 속에 담기 시작했다. 정상엔 엄 대장과 인증샷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인파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이 긴 포토존은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일단락됐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 의병 기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의병기지였다. 사면이 산지,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인 데다 물이 풍부해 최적의 요새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성과 우물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598년 조명(朝明)연합군에 쫓기던 왜군은 울산성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성엔 우물이 없어 왜군은 극심한 식수난에 시달렸다. 소변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겨우 목을 축였다. 본토로 쫓겨간 왜군은 나중에 구마모토성을 개축하면서 우물을 150개나 팠다고 한다. 당시 화왕산성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했기에 장기 농성에도 끄떡없이 견디며 호국산성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숱하게 사선을 넘어온 엄 대장도 가을을 탄다. 산에서 많은 아픔을 겪었기에 가을은 더 우울하게 다가온다고 한다. 산우(山友)였던 박영석 대장이 '영원한 히말라야인'이 된 날도 10월의 어느 날이었고, 2003년 로체샤르 등반 때 박주훈, 황선덕 대원을 '히말라야의 별'로 보낸 때도 가을이었다.

인간과 억새의 절묘한 이중주라는 가을산행, 누구에게는 달콤한 서정적 선율이겠고, 누구에게는 우울한 마이너 코드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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