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또다시 절반의 대통령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 초 한 번만 해온 것을 박 대통령은 매년 빠뜨리지 않고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소통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힐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의미는 그것뿐이었다. 박 대통령의 노력과 정성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평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안 하는 것이 훨씬 나을 뻔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 '청년' '개혁' '일자리'라는 화두를 수없이 언급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여야 의원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국정교과서 문제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대통령의 고매한 국정 철학을 곧이곧대로 듣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해야 대학도 가고 미래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거품 무는 선생님을 보는 듯했다.

야당 의원들의 행태도 꼴불견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의석 모니터 앞에 '국정교과서 반대' 문구를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대통령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지난해만 해도 건성건성 흉내라도 내면서 박수를 쳤지만 이번에는 단 한 번도 치지 않았다. 아무리 대통령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하지만, 국가원수, 행정부 수반에 대한 예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수준 이하다. 이렇게 인간적인 자질이 부족하고, 공인(公人)인데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우리 정치를 맡겨야 하는가.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와 대통령의 현실 인식, 국회의원들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됐으니 정치 혐오감만 더해질 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박 대통령이 더 이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남기는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문구로 국민 대통합의 적임자임을 강조해왔지만, 현 정국을 볼 때 헛구호로 그칠 것 같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때문이다. 이번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명확히 확인됐지만, 이 문제는 세대 간, 이념 간 갈등을 증폭시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1970,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영향으로 역사 문제에 민감한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국정화를 반대하는 야당 의원 대다수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이끌고 가는 50, 60대 계층 상당수가 그러하다. 이 문제는 두고두고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화약고가 될 것이고, 박 대통령의 치적을 상당 부분 훼손하는 사안이 될 것이다.

지난 12일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우리 사회가 한바탕 소용돌이치겠구나'라는 예상을 했다. 사회 현실과 정치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발표 후 2주 동안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떠했는가. 경제 살리기와 청년 일자리 해소 같은 민생 문제는 뒷자리로 밀려나가고, 역사교과서 문제만이 가장 큰일인양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이런 갈등 비용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거의 천문학적이다. 정부가 이런 혼란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너무나 무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라면 세대 간, 이념 간 갈등을 부추기고 국민을 반반으로 쪼갤 수 있는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국민 통합과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박 대통령이 이를 계속 추진하는 한,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대통령'과는 거리가 더 멀어질 것이다. 어떤 대통령도 이루지 못했던 '국민 대통합의 대통령'이라는 기대는 이제 물 건너간 듯하다. 다음 대통령에게나 바라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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