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
판단과 표현력이 서툰 자식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거짓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다고 했다. 약속을 세 번째 어기게 된 날에는 차라리 스물넷의 청년 혈기가 분노로 표출되는, 아니 정말 그런 표정이라도 보았다면 이 정도로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란다. 그때그때 온갖 핑곗거리를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음 약속일을 기대하며 입가에 수줍음까지 보이는 모습에 어미로서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몸서리까지 쳤다고 한다.
계속되는 악순환이 싫어 이번엔 작정하고 아주 넉넉한 시간을 벌어놓았다는데 모자간(母子間) 협상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이 짐작되었다.
2017년 어린이날을 내세웠으나 내년 크리스마스 날을 택하는 아들에게 이번만큼은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하는 아내의 음성이 떨렸다.
못난 아비가 감당해야 할 짐이 구치소 안에만 있는 줄 알았던 좁은 소견이 부끄러워지기만 했다.
이런 하소연 같은 아내의 울부짖음을 듣고 옥방(獄房)으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1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벽에 붙은 달력을 보니 내년 크리스마스는 주말이 될 것으로 짐작이 갔다.
왜 이렇게 날짜와 요일을 중요하게 검색하게 되었을까?
'결절성 경화증'이라는 희귀질환의 1급 정신지체장애 아들의 뇌 속에는 컴퓨터 달력이 비상하게 작동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2017년 5월 31일의 형기 종료일을 항소심에서 최소한 6개월을 줄여야 하는 녹록지 않은 일이 숙제로 주어졌다.
스스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는데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판사님께 탄원서를 쓸 요량으로 펜을 들었지만, 문장을 이어가는 도중 제목을 반성문으로 변경해야 했다. 아니 피고인 자격으로 병신 자식을 글 속에 팔아 탄원서 형식으로 만들어 가족의 불우함을 권리(?)로 내세우려고 한 나 자신이 미웠다. 인터넷 사이트에 중고 컴퓨터 매매를 위한 상품 설명을 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펜을 잡은 손이 굳었다.
6월 12일 오전 10시 항소심 법정.
판사님은 원심을 파기한다고 했다. 이를 두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절망'이라는 죄는 신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정호승님의 시구(詩句)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호송차에 몸을 싣고 구치소로 돌아오는 동안 2016년 달력을 머릿속에 그렸다. 성능이 떨어지고 노후된 것이라 본체 열 식힘 기능은 파르르 입술 떨림이 대신했다.
분명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출소일은 정확히 2016년 12월 2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옥방에서 철저히 반성하는 것과, 내년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 역할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스물네 살 청년에게 제발 아프지 말라고 당부한다.
뇌의 석회 물질도 못난 아비의 눈물로 더 이상 경화(硬化)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박대환(대구 수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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