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중소기업은 정부가 내세운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핵심 사안 중 하나인 '임금피크제'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하지만 지역 대표 중견기업인 '에스엘'처럼 일찍부터 임금피크제를 통해 청년고용을 실천하고 정년연장을 준비하는 기업들도 있다. 인력난을 겪는 대구경북 중소기업들은 획일적인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보다는 상황에 맞는 '가변적인 적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고 있다.
◆노사 화합으로 임금피크제 성공
자동차부품기업인 에스엘은 1954년 설립돼 현재 4천500명(계열사 포함)의 직원을 거느리는 대구경북의 대표적인 제조업체이다. 이곳의 노동조합은 1968년 출범해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사와 노조가 수많은 갈등을 겪으며 분규가 일어났을 법하지만 이곳은 그동안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도 없었던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에스엘 관계자는 "하지만 2004년 노조가 만 58세 1개월인 정년을 58세 12개월로 늘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노사 간의 대립이 전개될 위기에 처했었다"며 "무조건적인 정년연장은 결국 경영에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당시 회사 경영진은 난색을 보였다"고 말했다.
결국 정년연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회사로서도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카드가 필요했다. 에스엘은 정년연장과 고용창출, 경영안정이라는 점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임금피크제를 선택했다. 쟁점은 임금감액률이었다. 각각 30%와 10%를 주장한 사측과 노조는 20%라는 조건에 합의했다. 에스엘 경영진은 생소했던 임금피크제에 노조가 깊은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노력했던 점이 서로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낸 계기라고 평했다.
마침내 회사는 2005년 1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2006년 총 9명(계열사 포함)의 임금피크 적용 대상자를 처음 배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금피크제 도입의 효과가 나타났다. 임금피크 적용 대상자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 올 5월까지 에스엘이 신규로 채용한 인원은 1천900여 명이다. 이 가운데 약 55%가 30세 미만 청년들로 채워졌다.
에스엘의 임금피크제 성공은 정년이 연장된 고숙련 근로자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에스엘 관계자는 "숙련된 직원은 임금피크제를 통해 현장에 더 머무르고 또 삭감된 임금을 청년고용에 사용하니 신입사원이 현장에서 기술을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효과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지역에 맞춘 노동시장 개선 필요
에스엘은 수천 명의 직원을 둔 중견기업으로서 임금피크제 등을 도입하는 데 정부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직원 수가 10명 안팎인 중소기업은 이 같은 정부 지원을 노릴 수 있는 시간도, 여력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임금피크제 지원금을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주로 받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2013년 초부터 지난해 9월까지 임금피크제 지원금 지원 현황을 보면 278개 사업장, 2천545명의 근로자가 임금피크제 지원금을 받아 줄어든 임금을 보전받았다. 이 중 직원 1천 명 이상의 기업이 전체 지원 대상의 55.8%를 차지했다. 반면 10인 미만의 영세 중소기업의 경우 전체의 1.1%에 불과한 28명(21개 사업장)만이 지원금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지역 중소기업의 상황에 맞춘 노동시장 개혁 '지원팀'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대구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직원이 몇 안 되는 중소기업으로서는 노동시장 개혁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컨트롤타워'가 전국적으로 다양한 선행 사례들을 수집해 분류하고 나서 중소기업의 상황에 맞는 임금피크제 등을 알려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내년 60세 정년 의무화가 시작되면 또 다른 임금피크제 사례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어 지역 기업들에 선행 사례를 알려주기 좋은 기회다. 실제 임금피크제 도입 연령을 낮추는 대신 임금 삭감률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등 여러 경우의 수를 검토하는 기업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에스엘 역시 내년 정년 연장을 앞두고 임금피크제를 다시 손볼 계획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사실 협력업체가 많은 대구지역 중소기업으로서는 원청업체의 개선을 지켜본 뒤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며 "무엇보다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속에서도 신규고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중소기업에 혜택을 더 집중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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