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어진다. 처음에는 아가였을 것이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의 태명이 무엇이었는지 들어 본 적이 없다. 출생 신고와 함께 이름 석 자가 생겼다. 유년기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으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었던 기억은 없다. 내 이름이 확실하게 불린 것은 초등학교 입학한 후부터였다. 아침마다 출석부에 올린 이름을 불러주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것이 내 이름이란 것을 알았다.
인격을 갖춘 한 개체가 형성되었다. 내게 붙여진 이름이 나를 세상에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알았다. 내 이름이 자주 불리어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를 희망하며 청소년기를 모범생으로 살고자 했다. 가끔은 악동이 되는 일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다행히도 깨소금같이 고소한 추억들이라 생각되는 소소한 일들이었다. 기대한 만큼 이룬 것 없이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아들을 낳았고 아빠가 되었다. 처음 아들이 '아빠'라고 불러주었을 때 가슴 벅차게 기뻤다. 세상이 모두 무지개색깔인 듯 황홀했다. 꿈 같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생소하면서 아빠가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무량하였다. 큰일을 이룬 듯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라는 호칭은 생기발랄한 젊은 기운과 함께 가깝게 느껴졌다.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빠'라는 호칭은 금방 핀 예쁘고 앙증맞은 꽃처럼 싱그러워 좋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아빠라는 호칭이 없었다. 예외 없이 모두 다 '아버지'라 불렀다. '아버지'는 무겁고 먼 느낌을 준다. 오래되어 색깔 바랜 도자기처럼 낡고 보수적일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시절엔 대신할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예외 없이 모두다 '아버지'로 불렀던 것이 아닐까?
'아빠'라고 부르던 아들 녀석이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빠'라고 불리어지는 동안 늘 젊어 있었고 좀 서툴러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아들들과 함께하는 시간 내내 친구가 되었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물 가득 담은 저수지 같았는데…. 느닷없이 불리어진 '아버지'란 소리가 생소하게 들렸고, 갑자기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두 살 터울인 동생도 덩달아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날부터 '아빠'라고 불리던 좋은 시절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라고 불리어진 순간부터 더 어른스러워야한다는 부담감이 앞섰다. 아들에게서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동안에 모아온, 즐거움이 가득한 저수지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까지 들게 했다.
'아버지'로 불리면서 생긴 또 다른 그들의 기대. 내가 가진 능력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를 바랄 것 같은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어려움에 곤혹스러움을 겪었다. 그러나 반면 부응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최소한의 성과가 있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좋은 아빠에서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아들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아버지'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조소하며 빈정거린 선생님에게, 진심어린 고백을 조롱했음에 대해 사과하기를 요구하여, 공개 사과를 받기까지 했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다소 지나친 아들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 회자되는 아버지에 대한 표현에 의하면 자식들의 연령대별로 아버지의 모습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그의 블로그에서 아버지란 "4살 때,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살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12살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14살 때, 아빠는 세대 차이 난다. 25살 때,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다. 30살 때,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40살 때,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보자. 50살 때,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어. 60살 때,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조언을 들었을 텐데…."라고 쓰고 있었다. 또 "아버지가 되는 일은 쉬워도 아버지처럼 되는 일은 어렵다. 아버지는 늘 어른인체 해야 하지만 속으로는 소년이고 싶다. 가족에게는 동네 어귀의 고목이어야 하고 뒷산의 바위 같아야 하지만 혼자서 외로워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다.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도 하고,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함을 미안해하기도 한다. 자식들이 나를 닮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닮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생각도 한다"라고 했다.
'아버님'이 되었다. 며느리를 보았으니 당연히 '아버님'이라고 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며느리는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당연히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시집 온 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라고 부른다. 처음엔 잘 몰라서 그렇게 부르나 생각되어 왜 '아버님'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묻고 싶었다. 행여 마음 다칠까 염려되어 '아버지'라고 부름에 자연스레 응대한 지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이젠 그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좋다. '아버님'이 아버지의 존칭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새겨 보면 뜻은 좋다. 그러나 '아버지'보다는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를 시아버지가 아닌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싶었다. 요즘 며느리들은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한다는데 언감생심 시아버지를 친정아버지로 생각하는 며느리가 있을까마는 나는 나의 이 착각을 바로 잡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아버님'이 아닌 '아버지'로 불리고 싶었다. '아버지'란 부름이 정겹다. 따뜻하다. 어린 시절의 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겹쳐서일까?
아버지의 저녁 밥상에는 가끔씩 장남인 내가 겸상으로 앉았다. 장남 대접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혼자 특권을 누리는 듯 어깨 으쓱하면서도 내심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반주 드신 아버지는 불그레한 얼굴로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 인가요~'로 시작되는 '짝사랑'이라는 노래를 부르셨고, 뜻 모르는 노래의 멜로디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춤추는 흉내도 곧잘 내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따뜻했다. 당시의 인기배우였던 김진규와 많이 닮으셨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았다. 사나흘 만에 영화 프로가 바뀌는 날이면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영화 구경을 가셨다. 그런 모습을 보신 이웃 분들은 '김 아무개 각시 할래? 김진규 각시 할래?'라는 말로 부러움을 대신하기도 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는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 '아부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절이나 휴가철에 함께 모여 사랑을 안주삼아 한 잔 술 마실 때에는 '아부지! 아부지!' 부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 시간이면 행복에 겨운 나머지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노래를 부른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이렇게 가족들에게 그대들이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세월은 나를 '할아버지'로 승격시켰다. 손자들이 불러주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어떤 부름보다 좋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던 어린 시절의 아들이 거기에 함께 있는 듯해서 더 좋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말 할 수 있다. 손자가 최고라고…. 가끔씩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할아버지 엉덩이는 내 샌드백'이라는 작은 손자의 재롱이 귀여워 입이 귀에 걸리는 나는 손자 바보인가 보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빠'도 되었고 '아버지'도 되었고 '아버님'도 되었고 '할아버지'도 되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남들 하는 남자 구실을 다 한 것이다. 어떤 호칭으로 불려도 그 호칭에 맞게 살아야 함이 중요한 것. 그저 대우만 받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벽하지는 못해도 노랫말처럼, 가족을 위해 노래하는 시인이 되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되어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자.
▷필자 약력
- 김영식(69) 씨
- 전 학교 행정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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