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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어느 가난한 시인의 죽음

18세기 중반 영국에 '토마스 채터턴'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이 소년은 겨우 10살이 갓 넘은 나이에 낭만적인 시는 물론, 중세풍의 시를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데 글에 대한 원고료가 아주 적거나, 그마저도 편집자들의 이런저런 핑계로 떼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 며칠을 굶주린 소년은 1770년 8월 24일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지금껏 써 놓은 원고를 모두 찢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 훗날 채터턴이 남긴 유작들은 셸리나 워즈워스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화가 헨리 월리스는 채터턴의 최후를 낭만주의적 미학으로 화폭에 담으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지 않다. 작품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 번의 전시를 위해 길게는 수년 동안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 낸다. 숱한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폭넓은 대중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국공립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꿈꾸지만 그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전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설령 전시를 한다고 해도 작품 제작과 관련된 지원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지난 1월 22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와대에서 있었던 2015년 업무계획에서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서면계약을 의무화하고 작가보수제도를 올 하반기부터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작가들의 미술관 전시가 확정되면 서면계약을 체결하여 적정 수준의 보수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데 이보다 반가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한 해가 다 저물어 가지만 야무졌던 업무계획이 어디선가 표류하고 있다. 제도 수립을 위한 제반 조사의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혹시나'는 '역시나'로 막을 내릴 조짐이다.

시대적 정서를 읽어내는 민감한 촉각으로 작품세계를 문맥화해 전시로 펼쳐보이는 것이 미술관의 참모습이라면, 우리의 미술 구조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작가들 혹은 미술 관련 종사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구조를 구축하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절박하다. 완벽한 제도야 야무진 꿈이겠지만, 최소한 작가와 미술관이 공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장치 정도는 이제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냉혹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시인의 모습에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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