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은 어느 지역도 넘어설 수 없는 위치에 와 있다. 품질과 가격 모두 전국 선두.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5년에는 청송도 다른 지역과 별반 차이 없는 사과 생산지였다.
당시 사과시장은 그야말로 '불황'이었다. 시중에서는 사과 15㎏ 한 상자에 2만원 하던 것이 5천원까지 바닥을 쳤고 1t 화물차량에 한가득 사과를 싣고 공판장에 가도 인건비와 유류비 등을 빼면 재배 원가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사과가격 폭락은 사과 주산지인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 사과농가를 주저앉게 했다.
1990년대까지 곡물과 채소보다 소득이 높았던 사과는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났다. 포도와 귤 등에 밀려 점점 소비가 감소했고 오랫동안 지속해 온 사과 재배 방식의 한계가 서서히 드러났다. 높은 가지에 달린 사과 하나를 따려고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했고 품종이 단조로워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쏟아지는 물량을 감당하지 못한 사과농가는 눈물을 삼키며 내다 버리거나 땅에 묻을 정도였다. 참다못한 농민들은 거리로 나와 데모까지 하며 정부와 관련 기관에 하소연했지만 그들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때 청송 일부 농민들이 큰일을 냈다. 사과 선진지를 견학하면서 신품종 묘목을 들여온 것이다. 이 묘목은 성인이 서서 딸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고 밀식재배가 가능해 수확량까지 늘릴 수 있었다. 당시 경북도는 '신경북형 사과'라는 이름까지 붙이며 도내는 물론 전국으로 이 묘목을 보급했다. 이 품종이 바로 현재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키 낮은 사과'다.
◆문익점이 된 청송 농민들
문익점은 1364년 중국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넣어 몰래 들여왔다. 당시 문익점의 행동은 한반도의 생활환경을 개선했다. 목화씨를 통해 재배된 목화에서 솜이 나왔고 그 솜은 이부자리와 옷 등에 활용돼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줬다.
우리나라 사과 역사에도 문익점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청송 농민들이다.
1995년 1월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윤태명 경북대 교수(당시 안동대 원예육종학과 교수)의 주선으로 청송 현동면 현동과수협업단지 손계용(79) 대표와 남종식(56'전 경상북도 도의원) 이사 등 10명이 세계 최고 사과 주산지인 이탈리아 북부 남티롤 지방을 방문했다.
이들은 그 지역 사과 연구기관과 지도기관, 판매조합, 유통 및 가공시설 등을 둘러보면서 부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작은 규모의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놀라운 생산량과 품질을 보였기 때문. 그들이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밀식재배가 가능한 'M9' 묘목 덕분이었다.
손 대표는 남 이사의 제안으로 Kanepple 묘목회사로부터 M9 묘목 2천 주를 샀다. 하지만 이것을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정부 사전 허가 없이 외국으로부터 어떠한 동식물도 반입할 수 없었다. 역시나 김포공항 동식물검역소에서 여행가방에 실린 묘목이 적발됐다. 검역소 직원들이 원칙대로 묘목을 없애려는 순간 손 대표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농지원부를 꺼내 그들을 막아섰다.
손 대표는 "청송에서 사과 농사 짓는 사람들인데 지금 사과값이 폭락해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며 "묘목을 팔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키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한다"고 부탁했다.
그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검역소 직원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안모 과장(손계용 씨 진술 토대)은 "꼭 잘 키워서 성공하라"며 그들 가방에 다시 묘목을 담아줬다.
이후 1996년 1월 경북과수대묘협회가 이탈리아를 재차 방문해 M9 2만 주를 들여오다 김포공항에 압수됐고 경상북도와 식물검역원이 나서 이 묘목을 되찾았다. 경북대학교에서 격리재배된 M9 묘목은 모든 검증 절차를 거친 뒤 도내는 물론 전국 연구기관과 지도기관, 묘목회사 등에 널리 보급됐다.
◆키 낮은 사과 주인공 손계용 씨, 연구는 계속된다
지난 21일 사과 수확이 한창인 청송 현동면 손계용 씨 과수원. 손 씨는 밭 이곳저곳을 다니며 흠이 난 사과를 따내고 있었다.
손 씨는 "유기농 사과를 재배하다 보니 흠 있는 사과들이 많다"고 말했다.
손 씨는 지금도 남들이 하지 않는 사과 재배 방식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17차례에 걸쳐 외국 선진국 사과산업을 견학하고 국내에 적용해 왔다. 1996년에는 경북도가 지정한 신경북형 표준사과원이 됐다. 손 씨의 과수원에 M9 이중접목묘를 1㏊심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M9 사과목이 일반 사과농가에 심긴 것이다.
손 씨는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M9 묘목을 경북도에서 가져가겠다고 7개월 동안 구애했다. 같이 간 일행들과 상의해 연구가 끝나면 100% 청송에만 보급하기로 경북도와 약속했다. 하지만 경북도는 청송은 물론 전국으로 묘목을 나눠줬다. 처음에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손 씨의 과수원에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M9 묘목 10여 그루가 심어져 있다. 하지만 손 씨는 또 다른 사과 연구를 위해 M26 묘목으로 교체하고 있어 이 나무는 사라질 예정이다.
손 씨는 "M9 묘목보다 M26 묘목이 청송에는 더 맞는 것 같아서 그 연구를 위해 사과나무를 교체하는 것이다. 내가 또 길러봐야 나중에 심는 사람들이 실패하지 않을 것 아닌가"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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