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 通] 계명대 커피연구소 소장 신상헌 교수

"한국종(種) 커피나무 제주·수원·강릉에서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신 교수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촬영한 야생 커피.
"한국종(種) 커피 종자를 빨리 개발해야죠."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신상헌 교수가 커피 농가들이 수확한 체리 커피를 만져보고 있다. 계명대 커피연구소 제공
신 교수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촬영한 야생 커피.

18세기 브라질 출신 군인 파레타 대령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근무하면서 커피에 심취해 있었다. 조국에 이 향기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요새는 견고했다. 프랑스는 항구를 봉쇄하며 종자의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당시 총독 부인과 은밀한(?) 관계였던 대령은 이 고충을 말했고 귀국 날 그의 손엔 부케가 들려 있었다. 연인이 눈물로 전해준 이별 화환 속에 커피 씨앗이 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들어온 커피는 브라질을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세계 원두의 30%(연간 300만t)가 아마존 유역에서 생산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대구에도 파레타 못지않은 커피 전도사가 있다. 계명대 국제통상학부 신상헌(55) 교수다. 12년째 커피문화운동을 벌이고 있고 최근엔 '커피연구소'라는 사회적기업까지 설립했다. 창업 취지는 우선 커피 도구와 시설의 국산화 사업. 커피용품들이 우리 기술로 충분히 국산화가 가능한데도 무분별하게 수입에 의존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다.

신 교수는 몇 년 전부터 세계 각국을 돌며 커피 종자를 채취해오고 있다. 그것도 야생 우량종으로만. 신 교수의 이런 노력 덕분에 제주, 수원, 강릉, 호남 등지에선 한국종(種)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커피 신익점'을 자처하고 있는 신 교수를 계명대 연구실에서 만나봤다.

◆시애틀에서 커피산업에 눈뜨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으로 유명한 워싱턴의 중부도시 시애틀. 연중 강우량이 965㎜에 이르고 가을에 비가 집중된다. 우울한 도시 분위기 탓에 자살률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다. 이런 도시 분위기 때문에 시애틀에서는 일찍부터 커피문화가 발달했다. 스타벅스 등 미국 내 프랜차이즈 커피업체가 몰려 있고 개인 카페도 골목 곳곳에서 성업하고 있다.

2003년 신 교수는 시애틀에 연구교수로 가면서 온 시가가 커피숍으로 들어차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커피 취향은 인스턴트, 자판기 커피 수준에 머물러 있었어요. 큰 건물마다 들어찬 커피숍을 보고 깜짝 놀랐죠. 호기심이 일면서 커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낮에 학교 일과가 끝나면 카페를 순례하며 커피 맛에 빠져들었다. 아예 커피스쿨에 등록해 실전 경험까지 쌓았고 커피와 관련된 기사들을 스크랩하며 자료를 모았다.

이때 신 교수가 커피 맛과 향에만 탐닉했다면 지금의 열정 행보는 없었을 것이다. 신 교수는 '산업으로서 커피'에 더 주목했다. 미국 커피 산업의 한복판에서 커피 문화, 유통체계, 가공 기술 등에 대한 본격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현재 커피 시장 규모는 수천조원에 이를 만큼 석유 시장 다음으로 커져 있어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커피를 마시고 산업 종사자가 1억~2억 명에 이를 정도입니다."

◆영세 바리스타들 대부분 1, 2년 못 넘겨

2005년 신 교수가 귀국길에 올랐을 때 전국에 바리스타 열풍이 불고 있었다. 시내엔 한 집 건너 한 집이 카페였고 요지마다 프랜차이즈 숍들이 들어설 때였다.

"커피가 대중화되는 걸 보니 우선은 반가웠는데 1, 2년 앞이 훤히 보이더군요. 갓 기술을 배우고 나온 바리스타가 할 수 있는 건 메뉴대로 커피를 뽑아내는 건데 이걸로는 한계가 있어요. 외국에서는 산지에서 원두를 직접 사 온 다음 로스팅을 하고 그걸로 드립을 해요. 그래야 맛이 유지되고 품질관리가 될 수 있어요. 일본의 유명 카페에선 뙤약볕에 1시간씩 줄을 서서 겨우 한 잔을 받아들고 구석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풍경이 익숙합니다. 6개월 단기 바리스타가 자판기 뽑아내듯 커피를 만들어 내는 상황에서는 손님들에게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프랜차이즈 숍의 비대화, 개인 숍의 도미노 도산,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신 교수는 이 구조적 틀을 바꾸는 일에 나섰다. 우선은 커피와 관련한 글을 언론에 기고하면서 문화를 바꿔나가는 작업에 나섰다.

◆연구소 세우고 커피도구 국산화 나서

신 교수는 제일 먼저 2010년 커피연구소를 설립했다. 뜻을 같이하는 교원 4명이 힘을 보탰다. 10조원대로 성장한 한국 시장에서 한국적 커피 문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고, 무엇보다 90% 이상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커피도구의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수익의 대부분은 커피를 가공하고 기계를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 가져갑니다. 우리나라도 커피 소비량에 걸맞은 기계나 도구를 자체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커피연구소에서는 최근 디자인 전공교수와 연구진의 노력 끝에 한국형 커피드립퍼 '더 힐'(The Hill)을 개발했다. 이름처럼 언덕 모양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제품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작년에는 일본 도예가 아키야마 준 씨와 도예기술 전수를 목적으로 한정판 작품 드립퍼를 공동 생산해 출시 즉시 완판되는 성과를 올렸다.

올 8월에는 영국 러셀홉스사와 한국형 커피 주전자 국내 공동생산 합의를 완료하고 세부 투자사항을 진행 중이다. 또 그라인더, 드립서버, 텀블러 등 커피도구들을 직접 개발해 국내 시판은 물론 해외 수출까지 계획하고 있다.

신 교수의 선전을 기다리는 원군들도 많다. 계명대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학생들이 중국에서 '커피연구소'의 커피도구 론칭을 기다리고 있다. 현지에서 신 교수의 무역을 적극 돕겠다는 것이다.

다국적기업 그들만의 리그, 한국의 커피시장. 한국을 '커피 식민지'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이런 산업구조 속에서 실속은 프랜차이즈 기업이 챙겨가고 우린 캔, 병음료나 인스턴트 시장에서 푼돈만 만지는 신세가 돼버렸다.

현재 신 교수의 자산은 직원 4명에 자본금 3천만원이 전부. 이 인력과 실탄으로 수백 개의 다국적기업과 2천조원의 해외시장에서 맞서 싸워야 한다.

브라질에서 몇 개의 씨앗이 세계로 퍼져 나갔듯 신 교수가 뿌린 커피문화운동이 대구를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가길 기대한다.

◇10여 년째 세계 산지 돌며 야생커피 채취 '한국 종자' 개발이 꿈

커피 종자 개량사업 나선 '신익점'

"고려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 의류 혁명을 일으켰듯 전 한국에 커피 종자 혁명을 이끌고 싶어요." 10여 년째 각국을 누비며 종자개량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 교수를 만나 한국형 커피 종자 얘기를 들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커피가 재배되나.

▶현재 제주도, 호남은 물론 강원도, 수원에서도 커피가 자라고 있다. 커피는 2℃ 이하에서 냉해를 입기 때문에 현재 시설에서만 재배된다.

-제품에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나.

▶이번에 제주도 '코리아커피'에서 처음 상품화에 성공했다. 60㎏을 수확했는데 바로 매진됐다. 재배면적을 대폭 늘릴 예정이다.

-커피 씨는 어디서 가져오나.

▶이제까지 10여 년 동안 인도네시아, 중국 윈난성 등 5, 6개국을 다녔다. 주로 고산지대 야생커피만 따온다. 채취한 열매는 제주도 등 재배지로 보내고 그곳에서 우리나라 풍토에 맞춰 종자개량을 한다.

-현지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고산지대에서 자동차가 구덩이에 빠져 곤란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야생나무를 발견하고 현장에 접근하면 불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카메라 렌즈가 개미집이 될 정도였다. 약을 뿌려도 별로 도움이 안 됐다.

-계명대에서 야생커피 전시회를 열었다는데.

▶지난 23~26일까지 아트센터 앞에서 '야생커피 사진전'을 열었다. 사람들이 늘상 커피를 마시지만 그 원료인 체리 열매나 생두, 원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시민들이 커피의 정체에 대해 많은 이해를 넓혔으리라 생각한다.

-기관, 단체나 정부 도움 없이 자비로 이런 활동을 하나.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난 술, 담배를 하지 않으니 비용은 그걸로 댄다. 문익점이 사심(私心) 때문에 목화를 가져왔겠나. 친구들이 날 '커피 신익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정도 애국 행보는 아니고 난 그저 이 일이 즐거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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