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힐링토크] 하이닉스 반도체 전무·충북 부지사 등 지낸 노화욱 극동대 석좌교수

"가을 산처럼, 최선을 다한 후 아낌없이 불타는 사람이고 싶어"

봉사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노화욱 씨.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봉사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노화욱 씨.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그의 삶은 지금의 계절을 닮았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가을과 흡사하다. 그는 군대 제대 후 현대중공업 직원으로 시작해 하이닉스 반도체 전무를 지냈다. 그 후 충청북도 부지사를 하면서 지방자치단체 최고의 투자유치액인 14조원을 초과 달성했다. 확실한 전리품을 챙기자 그는 미련 없이 부지사직을 버리고 진도로 갔다. 진도에서 문화의 향기에 취할 때쯤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콜이 왔고 또 다른 기업에서는 최고 경영자 자리를 주겠노라고 했다. 충청도의 한 대학에서는 교수를 제안해 왔다. 그는 고민 없이 지방대학의 교수를 택했다. 일선에서 겪었던 경험을 고스란히 젊은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화욱(62'극동대학 석좌교수) 씨. 그는 지금 커피에 빠져 착한 소비를 추구하는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이사장을 맡으면서 인생의 또 다른 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경기도 분당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다양한 삶이 부럽다.

▶항상 일복이 많았다. 언제나 일을 보면 열정이 생겼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듯하다.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젠 커피와 관련된 글까지 쓴다. 욕심이 많은 것 아닌가.

▶커피는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나에겐 사색의 창이다. 내 삶에 가장 친숙한 도반이자 연인이 되었다. 커피가 주는 정신적 향기가 좋다고나 할까. 2009년 문인들과의 유럽문학기행에서 커피의 맛에 눈을 떴다. 그 후 커피와 사랑에 빠졌고 커피를 공부하게 됐다.

-지면에 소개된 글과 시를 보면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다.

▶배를 키우는 친구의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그가 수확한 배는 늘 유명백화점에서 최고의 가격을 받았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조합장 선거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배가 팔리지 않았다. 퇴비와 정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사회의 퇴비와 같은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사람에게 향기를 불어넣고 더 풍부한 삶과 품격을 부여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현대에 입사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나에게 현대중공업은 거대한 캠퍼스였다. 도처에 있는 상사들은 스승이었고 선박 건조의 다양한 현장과 사무실은 기막힌 강의실이었으며 어마어마한 실습장이었다. 현장이 바로 대학이었고 대학원이었다. 거기다 '정주영'이란 대스승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말단사원이었을 텐데 정주영 회장과 가까운 만남이 가능했나.

▶인사부서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말석에 앉아 대스승의 말을 메모하며 청강할 수 있었다. 그는 매사가 새롭고 기발했는데 상식을 떠난 지시가 없었다. 그의 말 중 핵심은 '이봐, 해봤어'였다. 해보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결론을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매번 설레는 시간이었다. 그를 통해 직장경영 인생경영 사람경영을 배웠다. 더구나 능력을 인정받아 신입사원에서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초고속 승진의 이유는.

▶국제기능올림픽과 노사협의회였다. 국제기능올림픽은 2년마다 항상 목표 이상의 성과를 냈고 노사협의회는 전국적인 모범이 되었다. 특히 기숙사를 자기계발과 문화 스포츠 공간으로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아미문화센터'가 나의 작품이다. 정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이 문화센터를 소개하면서 전 현대 계열사가 문화회관을 앞다투어 오픈했다.

-같은 현대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주 인색하던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장 시절의 청계천 성공을 신주처럼 붙들고 자만하고 착각했다. 토목을 기초로 한 4대강 사업은 얄팍하게 국민을 속이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노자가 말한, 공을 세우면 물러나라는 '공수신퇴'(功遂身退)는 현재의 경영학에서도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의 가치를 우선하며 사람의 행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지금의 리더십은 국민을 통합하고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

-인사 담당을 오래 했다. 그때 노사분규가 없는 직장을 만들었다.

▶핵심은 신뢰였다. 나는 현대 임원 중 유일하게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골프를 하면 근로자들이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을 때면 그들과 목욕하고 등산을 하거나 혹은 술집에 앉아서 함께 즐거워하고 아파했다. 그들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직원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회사를 떠난 지 10년이 되는 지금도 집안에 변화가 생기면 전화하고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번 주에도 아들 주례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하이닉스를 떠났어도 옛 직장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나.

▶하이닉스는 내 손으로 관리 분야와 각종 제도, 조직 시스템 등 모든 것을 만든 회사다. 이 회사가 2000년 반도체 시장의 어려움으로 결국 채권단이 운영하는 회사가 됐다. 반도체 회사는 연구 분야에 끊임없이 재투자해야 하고 직원들의 사기가 바로 품질을 결정하는 곳이다. 나와 동고동락했던 후배들에게 지속 가능한 일터를 물려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집을 떠나서도 친정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결국은 SK가 인수하도록 만들었다.

▶회사를 나와서도 내 분신 같은 직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리고 경쟁력 있는 회사가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최태원 회장과의 독대를 통해 그를 설득하고 마침내 인수토록 했다.

-전자업계의 유엔군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사람을 뽑을 때 치우침이 없도록 했기에 붙여진 별명인 것 같다. 인사의 독점과 담합의 폐해는 조직과 사람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지연과 학연 또는 전 직장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능력 중심의 회사를 만들려고 일관되게 노력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철저하게 지방대학 쿼터 비율을 중시하고 전문대생이나 공고생의 구성 비율을 유지토록 했다.

-충북부지사는 어떻게 맡게 됐나.

▶나는 마산 출신이며 충북에는 연고도 없다. 그런데 2006년 하이닉스를 그만두고 지리산 쌍계사의 작은 암자에 들어가 그동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였다. 충북도청에서 제안이 왔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이닉스가 어려울 때 청주시민들이 보여준 사랑과 응원 때문이었다. 문인들이 공장에 와서 근로자들을 위로하는 시낭송의 밤을 열어 줄 정도였다. 그때 청주시민을 위한 보은의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갚겠다고 한 말이 있어 외면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부지사'란 자리를 정치지향적인 사람이 가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충청도이지만 낙후돼 있었고 하이닉스가 어려울 때 보여준 지역민의 사랑을 갚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다.

-조건이 있었다는데.

▶지자체 중 최고 투자유치액인 14조원 이상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즉시 서울에 야전사령부부터 꾸렸다. 10명이 넘는 공무원들이 서울과 청주를 오가며 일했다. 마침내 2년 이내에 성과를 이루었다. 그래서 떠났다.

-아름다운 용퇴라고 회자되고 있다.

▶어떤 분야의 지도자든 특히 기업경영자는 과거의 성공을 즉시 잊어야 한다. 그것에 머물거나 연연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 시간과 환경의 변화는 같은 방법에 의한 반복의 성공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혁신과 창의가 필요하다.

-부지사에서 물러나자 많은 곳에서 오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왜 대학으로 갔나.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고문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있었고 기업의 CEO로 와달라는 곳도 있었다. 이것을 거절하고 시골서당의 선생을 택했다. 걸어온 길에서 얻은 경험과 혁신 사례를 대학 운영에 전수하고, 기업에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현장 교육을 가르치고자 하는 욕심이 컸다.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와 인연은 어떻게 닿았나.

▶충북의 부지사로 근무하면서 베트남 자매도시를 방문했을 때였다. 월남전쟁 당시 우리가 행했던 흔적들이 곳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다. 베트남과의 공정무역을 통해 그들의 노동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조금이나마 진 빚을 갚고자 했다. 이것이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의 일을 하게 된 동기다. 베트남의 커피와 초콜릿, 캐슈넛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인생을 살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나 글이 있다면.

▶사랑의 실천과 깨달음이다. 그동안 말과 글을 배우면서 생각의 틀만 만들어왔다.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이런 것들이다. 이제는 깨달음의 대자유를 누리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경영자로서 마지막을 현대아산의 사장으로 마감하고 싶었다. 대북 민간경제의 노둣돌로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회장의 작고와 그룹 분리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친구들이 세상의 정의를 위해 싸울 때 나는 대기업에서 오로지 일에만 미쳐 살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선후배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이제부터라도 그 빚을 갚기 위해 봉사로 남은 생을 보낼 계획이다.

-개인적인 소망은.

▶현장에서의 경험과 배운 것들을 책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나의 책이 세상의 또 다른 쓰레기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루어 왔었는데,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보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노화욱

비가 오는 것이 아니다

시가 메마른 세상을 적시는 것이지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랴

사랑 그 아쉬움을 내려놓는 게지

어제 본 영화처럼 가을이 가네

돌아보면 내 삶도

지나온 계절마다 온통

두고 온 빚더미

세월은 억새풀에 흔들리고

마을 앞 우체통처럼

너 또한 기다리겠지만

나는 없어

그대 가슴 한 켠 데워 줄

붉은 시 한 수 없이

이대로 아직은 돌아갈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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