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 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 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 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전문.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상처로 물이 고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이 상처의 집을 짓고 있다."(「맨드라미 피는 까닭은」) 맨드라미는 물이 지은 붉은 상처의 집이다. 그리하여 시집의 곳곳에 등장하는 붉은 맨드라미는 삶의 상처와 함께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 "우글거리는 상처" 때문만은 아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칼자국"을 우리는 식별해 내지도, 잘 기억해 내지도 못한다. 우리의 삶이 갇혀 있다고 절망하거나 삶을 탕진해 버리는 것은 우리 삶의 끝에 죽음이라는 벼랑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죽은 나무에 젖을 물리고, 죽은 나무의 이마를 짚어주는 둥근 햇살을 생각한다. 우리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지만 햇살은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하여 맨드라미는 상처의 집이지만 지금도 제 키를 키우고 있다. 이것은 의지의 맹목성이 아니라, 종말을 꿰뚫고 돌파해버리는 비극적 사유이다. 우리의 삶이 먼지처럼 쌓여간다 하더라도 서러워하지 않는 세계관. 이제 물로 지은 상처의 집인 맨드라미는 피가 간지러워, 햇살 속에 스민 검은 웃음을 자신의 붉은 몸에 속속들이 박아 놓는다.
그럼에도 하나의 화두가 남는다.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그러나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집과 골목이 동시에 있는 '정치'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 것. 결국 이 화두는 가짜 질문이 되거나, 또 다른 통로를 찾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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