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희창의 에세이 산책] 등장인물 납시오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아빠요? 리모컨 미라.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서 텔레비전 채널만 쉴 새 없이 돌려요." "그럼 엄마는? 엄마는 어떤 분인데?" 잠깐 생각하던 아이는 엄마의 아이콘을 결국 찾아내었다. "먹는 사람!" 남는 음식이 아까워 처리한 것뿐인데, 변명해 본들 소용없다. 아이의 눈에는 미라와 식충이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걸 어쩌랴.

늦가을의 우수에 젖은 감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아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이리도 다르다고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회사에서 온종일 시달려 멍하니 앉아 쉬는 것뿐, 그 나름 열정적이고 학구적이라고 뻗대지 마시라. 한번이라도 책 읽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지 않은가?

내면의 모습과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둘 다 맞지 않을까? 매일매일 가면을 쓰고 나타나야 하는 등장인물은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이제는 가면과 살갗이 착 달라붙어 하나가 되어 도무지 나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렇게 어김없이 등장인물로 살아가고 있다.

녹음기에서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만 빼고 다 익숙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만 낯설게 느끼는 것처럼 타인의 눈으로 보는 모습도 내 모습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는 게 억지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몰라서 그래,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말라, 타인은 나의 거울이니까,

"선생님 지금 화나셨죠?" "아니요. 전혀 화나지 않았어요." "아닌데요. 화난 얼굴이에요. 혹시 저한테 화나신 거예요?" 화나지 않았는데 화났느냐고 물으니까 진짜 화가 났다. 그리고 얼마 후에 거울을 보았다. 잔뜩 화가 난 인간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 화난 것처럼 보이는구나. 웃어야지.'

'진정한 나를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명상 수련을 실행하는 곳들이 꽤 있다. 그럴듯하지만 더욱 실망만 안겨 줄 것 같은 염려가 든다.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찾았다고 비친들, 비치는 모습은 그게 아니고 끊임없이 등장인물로 나타나야 하는데 진정한 내 모습이 있다고 가정하는 게 무리 아닐까?

그래, 외딴 섬에서 혼자 살면 모를까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해야지. 실제로는 자신이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감정노동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친절이 몸에 배 활달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어느새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를 구분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어떤 나'가 되고 싶은지 물으며 살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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