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장사지와 무장산 억새밭

바람불면 자지러지는 억새 군락 은빛 처용무

무장봉 전망대 아래로 펼쳐지는 억새의 바다.
무장봉 전망대 아래로 펼쳐지는 억새의 바다.
무장봉 억새밭 가는 데크길.
무장봉 억새밭 가는 데크길.
무장봉 가는 길목에 있는 무장사지 통일신라 삼층 석탑.
무장봉 가는 길목에 있는 무장사지 통일신라 삼층 석탑.

풍성한 마음으로, 황금의 들이 끝나는 암곡주차장에서 무장산 트레킹을 시작한다. 가을 산은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붙는다. 무장사지 삼층 석탑 안내판을 따라 걸으면 청초한 야생화가 아는 체를 한다. 암곡탐방센터를 지나고 계곡 입구 돌다리를 건너면, 시나브로 산그늘을 끌고 가는 숲길이다. 첫 갈림길에서 왼쪽 무장사지 방향으로 한발 한발 느바기(느리게, 바르게, 기쁘게) 걷는다. 가다가 건너는 징검다리 물속에는 아름다운 은피리가 살고 있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흐르는 물소리 더욱 청아하다. 뜰흥징징 동당 가야금 소리처럼 맑은 물소리 타고 헤엄치는 투명한 은피리가 몸 사이사이를 빠져나간다. 마음이 맑아진다. 골짜기는 깊어진다. 여덟 번째 징검다리를 건너고 나니 어느새 무장사지. 어둡고 먼 골짜기를 지나 감미로운 햇빛 쏟아지는 고요한 공터에 무장사지가 있다. 무장사는 통일신라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이 지은 절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무열왕이 투구와 병기를 묻은 골짜기에 지은 절이라서 무장사로 불렀다. 무장사지 삼층 석탑(보물 제126호)과 아미타불 사적비, 이를 받치고 있는 이수귀부가 남아 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고도가 차츰 높아지고, 무장산 2.5㎞ 남았다는 이정목을 지나 군데군데 억새가 보인다.

제법 숨이 차오르는 임도 길을 30분 더 오르자, 광대한 산정을 가득 메운 흰 꽃의 억새 군락이 장관을 연출한다. 가을바람은 쉬지 않고 불고, 억새는 누웠다가 일어나고 다시 나부끼다가 눕는다.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치는 만파식적의 젓대처럼 허밍하는 억새의 휘모리를 부리에 물고 산새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 옛날 오리온 목장지였던 이곳, 소들은 어느 날 오리온 성좌로 떠나고 지금은 억새의 나라, 영원한 동화 속의 나라가 되었다. 억새밭 사잇길을 걷다가 서서 돌아보고, 다시 걷다가 휘파람을 불어본다. 사랑의 아픔을 안다면 저 억새의 코러스가 흐느낌인 것을 알리라.

무장봉 정상 전망 데크에서 해 뜨는 동쪽을 보면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지가 있는 봉길리가 보이고, 포항 앞바다, 단석산, 토함산, 동대봉산, 함월산, 운제산이 보인다. 일망무제다. 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의 파노라마는 경이롭다. 신라 천년의 혼이 숨 쉬는 산들이 무장산을 에워싸고 있는 셈이다. 정상에는 사진 전시회도 열리는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들은 왜 무엇에 이끌려서 이곳에 왔을까. 무장봉을 뒤로하고 서서히 내려간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자지러지는 억새의 군무, 은빛 물결로 출렁이는 억새의 처용무.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내려가기는 쉽다. 내려오는 길은 잠깐이다. 어정어정 걸어도 처음 삼거리 무장사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에 도달한다. 성급한 낙엽은 벌써 흙에 뒹굴고, 점차 익어가는 단풍은 가을빛으로 역력하다. 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은피리를 키우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랑은 왜 낮은 곳으로 흐르는지 알 것 같다.

들머리인 암곡탐방센터가 날머리가 된다. 시곗바늘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나온 것이다. 황금빛 들판에 날아다니는 밀잠자리 떼와 같이 걷는다. 한눈파는 사이 밀잠자리 떼는 떠나고, 나는 혼자가 된다. 마지막에는 항상 혼자가 된다. 터덜터덜 걷는다. 황혼에 물든 그림자가 종종종 따라온다. 이맘때쯤이면 성황을 이루는 먹거리촌에 들어선다. 가게마다 손님이 있고 주로 막걸리와 파전으로 허기를 달래고 위로를 얻는다. 마음의 앙금을 씻어준 하루의 길이 발목을 감는다. 이제 저 회색의 도시로 가면 쓰러지면서도 줄기차게 일어나던 흰 꽃의 억새를 가슴에 꽃꽂이하리라. 일상생활이 창백하고 메마를 때, 한 줌의 행복 같은 억새를 꺼내어 보면서 상처를 치유하리라.

글 김찬일 대구 문학인 트레킹회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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