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비밀은행

근무하는 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상적인' 직업 가운데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세리(稅吏)일 것이다. 업무상 다른 이로부터 돈을 거둬야 하기 때문일 것인데, 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세리에 대한 나쁜 인식은 성서에도 나온다. 유달리 이재(理財)에 밝았던 유대인들은 세리를 지옥의 야차처럼 취급해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나중에 세리와 어울리고, 제자로까지 삼았던 예수가 동시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한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세리에 대한 나쁜 감정은 동양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가혹한 정치에 빗대 흔히 쓰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서도 잘 나타난다. 렴(斂)은 거두는 것, 주(誅)는 강제로 빼앗는 것을 뜻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보다도 가혹한 착취가 더 무섭다고 했으니 이를 집행하는 세리야 말할 것도 없다.

자본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세금 문제는 어느 나라 가릴 것 없이 골칫거리였다. 특히 많이 벌면 벌수록 누진세를 적용하는 대다수 선진국일수록 더 심했다. 이런 가운데 몇몇 나라가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예금의 출처를 묻지 않고, 예금자도 철저하게 숨기는 비밀은행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위스나 케이먼 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들 나라는 아직도 이 정책을 고집한다. 정당하게 벌었지만, 너무 심한 세금 탓에 도피한 예금을 보호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할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마약 거래나 뇌물 등 불법으로 얻은 수익까지도 버젓이 보호하고 수수료를 챙기니 당연히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나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영국에 본부를 둔 조세정의네트워크(TJN)는 2년마다 조세 피난처 국가를 발표한다. 이 단체는 2012년, 조세 피난처에 숨은 상위 20개국의 비자금이 7조6천억달러에 이르고, 한국 자금도 7천790억달러(약 900조원)대로 추정된다고 밝혀 국내에 큰 충격을 준 그 단체다. 올해 순위도 예년과 큰 변동 없이 스위스, 홍콩, 미국, 싱가포르, 케이먼이 선두를 차지했다.

비밀은행은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 들통나 모두 빼앗기더라도 비밀은행 계좌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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