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1)신성일

신상옥 감독이 '로맨스 빠빠'의 주연배우를 모집할 때였다. 신 감독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오. 당신 이름은 새로운 별 그리고 그중에서 일등, 신성일(申星一)이야"라고. 다음 날 신문기사에는 "3천83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구 출신 신성일이 주연배우로 선발되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돈 떨어져 신발 떨어져 애인마저 떨어져/ 이것 참 야단났네. 큰일이 났네.

대포 한잔 생각나네, 갈비 한 대 뜯고 싶네/ 낙철이야 빈털터리야 3등 인생이라."

'신영'은 김용만의 '삼등 인생'을 흥얼거리며 충무로를 걷고 있었다. 서울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대구에서 서울 올 때 차비가 없어 공군 중위인 신구 형이 조종하는 공군 수송기(C-46)를 타고 김포 비행장까지 왔다.

이렇게 어렵게 상경하여 서울대학 입학시험을 쳤다가 낙방을 했다. 그 후 어머니와 신영은 형이 조종사로 근무하는 수원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업을 해 가난한 형에게서 독립을 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머니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그러나 대학도 다니지 않았고 기술도 없는 그로서는 막연하게 그날그날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충무로는 연예계의 심장으로 명동에 붙어 있는 화려한 도시 골목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다만 하나의 잿빛 뒷골목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 골목이 갑자기 밝게 보였다. 중부경찰서 쪽에서 미도파백화점 쪽으로 '마카오 신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래위로 희디흰 양복을 빼어 입고 양쪽으로는 '가방 모지' 둘을 거느리고 젊은 신사가 거들먹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신영의 또래의 젊은 사내였다. 가까이 온 그를 보자 신영의 심장은 멈추는 것 같았다. 용호였다.

이미 그 시절 손용호는 '손시향'이란 유명가수가 되어 있었고 서울농대에 다니면서 'KBS 노래경연대회'에서 입선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959년 어느 날 그들이 만났을 때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58년에 나온 손시향의 '검은 장갑 낀 손'은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어 있었다. 1959년 그 해도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곡도 날개 돋친 듯 음반이 팔리고 있던 중이다.

신영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용호를 객지에서 만나는 반가움이 더 커서 자신도 모르게 "용호야"하며 큰 소리 쳐 불렀다. 용호 아니 손시향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신영을 보고도 전혀 반가워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신영이 아이가"하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의 공연시간이 바빠서인지도 모르겠다. 신영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오랜 시간 서 있었던 모양이다.

손시향의 집은 대구에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그 당시에 이미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 그는 중앙국민학교를 나오고 경북중고교를 졸업했다. 형제들은 외모도 출중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손시향은 감미로운 목소리에다 얼굴까지 미남이어서 '한국의 팻분'으로 불리며 뭇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동생 손미희자는 1960년에 미스 코리아 진에 선발되어 배우가 된다.

신영의 집도 큰 부자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은행에 다녔고 해방 뒤는 지점장이 된다. 어머니는 경북여고(2회)를 나와 경북도청 공무원 그리고 적십자사 임원으로 근무하는 재색을 겸비한 분이었다. 신영은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손시향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 공교롭게 고등 3년 동안은 쭉 같은 반에서 공부하였다.

신영은 시향이 지나간 미도파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향은 가고 없고 행인들만 오가고 있을 뿐이다. 한참 뒤 그의 발걸음은 저절로 중부경찰서 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한국배우전문학교'라는 간판이 보였다. 갑자기 '저 길이 내가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록을 하겠다고 신청했으나 이미 마감이 되었다고 했다. 뒤돌아 나오는 그에게 원장 김인걸이 물었다. "꼭 배우가 되고 싶냐?"면서 6개월 뒤에나 될 등록을 특별 전형으로 받아 주었다. 학원의 기라성 같은 강사들이 신영에게 배우의 탄탄한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신영은 항상 그 스승들에게 감사하며 일생 동안 존경한다고 말했다. 영화감독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연극계에서는 박진, 이진순 그리고 양광남이 그의 선생들이었다.

1959년 8월 어느 날 강신영이 '신성일'이 되는 사건이 생긴다. 학원을 졸업한 뒤 단역도 마다하며 언젠가 신인 주연을 선발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생각하면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중에 대배우가 되었을 때 "단역이나 하던 배우가…" 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배고픔도 참고 견디던 어느 날 신상옥 감독이 신인 주연배우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 없어 분위기만 보러 갔다.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는데 국제극장 일대는 대배우를 꿈꾸는 젊은 남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를 비를 맞으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옆구리를 찔렀다. 구두닦이가 "앞에 보이는 다방 있죠? 저기로 아저씨 좀 오래요"라고 한다. 그 다방에 올라가니 자신을 불렀다는 신사가 그에게 말했다. "3시간 뒤 저기 보이는 사무실로 올라가 신상옥 감독을 만나"라고 그가 말했다. 촌닭 신영은 "신 감독을 모르는데요"라고 말하자 "그럼 최은희는 알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신 감독이야"라고 했다.

길고 긴 3시간이 지나고 신 감독을 만났다. 그는 물끄러미 신영을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오. 당신 이름은 새로운 별 그리고 그중에서 일등, 신성일(申星一)이야"라고. 다음 날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된 기사에는 "3천83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구 출신 신성일이 '로맨스 빠빠'의 주연배우로 선발되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대구가 낳은 대배우 신성일은 그 후 506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16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다. 그는 "운명은 있다"면서 영천 '성일가'(星一家)에서 그의 새 인생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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