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좋은 의사, 좋은 환자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

환자가 아프기 전 처방해야 좋은 의사

환자들은 의사 처방 믿어야 빨리 나아

은행·고객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

신뢰 바탕으로 고객 미래 함께 열어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겨울이 훌쩍 다가왔는지 새벽녘이나 늦은 밤이 되면 하얀 입김이 솔솔 나올 정도로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런데 한낮에는 또 마냥 춥지만은 않은 날씨인지라 두꺼운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큰 일교차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엊그제는 기어코 감기에 걸렸다. 젊었을 때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사계절을 났는데, 이제 감기는 겨울이 다가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환절기에 걸리는 감기는 방심하면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많은지라, 부랴부랴 집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따끔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집에 들어와 감기약을 먹은 뒤 한숨 푹 자고 나니 몸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의사의 처방전대로 약을 이틀 치 받아왔는데, 굳이 다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둘째 날은 약을 먹지 않았다. 집사람은 그러다 또 감기 걸린다며 약을 마저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한 고집 하는 나는 괜찮다며 기어코 약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다 나은 줄 알았던 감기가 처음보다 더 심하게 걸려버린 것이다. 집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끌끌 찼고, 남은 약을 먹어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결국 다시 병원을 찾아야 했다. 이틀 만에 병원을 다시 찾은 나를 본 의사는 약이 효과가 없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내가 피운 고집의 결과를 고백해야만 했다. 무안함은 기본이요, '그러게 의사 말을 들으셨어야죠'라는 의사의 충고는 덤이었다.

생각해보면, 은행장 시절 나는 직원들에게 종종 은행과 고객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빗대어 말하고는 했다. 환자가 몸이 안 좋아 의사를 찾고 의사는 환자에게 진단과 처방전을 주듯이, 고객이 금융이 필요해 은행을 찾으면 은행은 그런 고객의 상황을 파악해 금융을 지원해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나는 늘 우리 직원들에게 '좋은 의사와 좋은 환자'의 관계가 되라고 말하고는 했다. 좋은 의사는 환자가 아프기 전에 미리 증세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할 줄 아는 의사다. 좋은 환자는 의사의 처방을 잘 따르고 스스로 쾌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줄 아는 환자다. 의사가 환자의 증세를 미리 파악해 알맞은 처방을 하고, 환자는 의사의 처방을 믿고 행함으로써 더 빨리 병을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좋은 의사와 좋은 환자의 관계다.

은행과 고객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은행은 고객에게 단순히 좋은 금리 그리고 많은 자금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컨설팅을 통해 어디가 아픈지 또 얼마나 아픈지를 찾고, 그것에 맞는 처방을 해야 좋은 은행이 된다. 고객 역시 좋은 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은행을 통해 금융 지원을 받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은행이 지원해주는 컨설팅을 받고 이를 바탕으로 기업 구조개선을 통한 경영 효율화와 같은 자구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신뢰가 바탕이 되어 고객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것이 은행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장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에 있는 고객을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고객이 처하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상품과 서비스 개발을 위해 늘 최선을 다했었다.

돌이켜보니 은행장 시절에는 그래도 꽤 좋은 의사 노릇을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의사 말도 제대로 안 듣는 나쁜 환자가 된 것 같아 민망한 날이었다. 집사람 잔소리가 더 들리기 전에, 의사 선생님 말대로 꼬박꼬박 약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좋은 환자가 되어야겠다.

※이순우: 1950년 경주 출생. 대구고·성균관대 법학과 졸.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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