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허긍열의 알프스 기행] 발롱 고개

여름에만 깨어나는 알파인 호숫가 휴식…삶의 무게도 내려놓은 듯

발롱 고개 정상에서 쉬는 현지 트레커들
발롱 고개 정상에서 쉬는 현지 트레커들
에크랑 산군에서 가장 큰 로비텔 호수
에크랑 산군에서 가장 큰 로비텔 호수
뮈젤 호수로 내려가는 트레커들
뮈젤 호수로 내려가는 트레커들

알프스의 2,000m 지대는 여름이면 대개 눈이 녹아 풀밭이 형성되고 각종 야생화가 피어난다. 기후 또한 선선하여 산책하기 좋아 산을 즐기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크고 작은 호수들도 많은데, 만년설을 이고 있는 주변 산들에서 발원한 수정처럼 맑은 물이 모여 보석처럼 잔잔한 호수들을 이루고 있다. 연중 8개월 가까이 눈과 얼음에 덮여 있다가 여름철에나 깨어나는 알파인 지대의 호수들은 일상에 지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처다. 삶의 무게야 누구에게든 있게 마련이라 알프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필자도 종종 땀 흘려 고개를 넘고서, 호숫가에 앉아 힘들었던 짐들을 내려놓으면 한결 살 만한 세상임을 깨닫게 되고 의욕이 생긴다. 이번에는 에크랑 산군의 남측에 위치한 발롱 고개를 넘으며 두 알파인 호수에 가 본다.

산행 기점은, 우리나라의 속초 정도 되는 유서 깊은 중소도시 그르노블에서 한 시간 거리의 부르드와장(Le Bourg-d'Oisans)이다. 에크랑 산군의 관문인 이 마을에는 식당과 선술집, 옷가게와 신발가게 등 각종 편의시설뿐 아니라 작은 서점이나 은행까지 있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남동쪽으로 빠져나와 30분 걸으면 여행자 숙소(Gite'지트)가 있다. 깨끗하고 저렴할 뿐만 아니라 알프스의 운치마저 느낄 수 있어 트레커가 묵어가기 좋은 곳이다. 한동안 계곡 바닥을 완만하게 끼고 오르면 거대한 폭포가 나타나며 폭포의 냉기로 땀을 식히고 30분 더 걸으면 레 고스와르(les Gauchoirs) 마을에 닿는다. 10가구도 되지 않는 조용한 산간마을 중앙에 우물이 있어 쉬어가면 좋다. 한편 부르드와장에서 차량을 이용, 이 마을이나 옆 마을 당쉐르(Danchere)까지 이동할 수도 있다. 이제부터 길은 줄곧 오르막이지만 엄청난 기세로 흘러내리는 급류가 땀을 식혀준다. 30분도 채 오르지 않아 계곡 건너편 당쉐르 주차장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 르 로비텔 호수(le Lauvitel'1,546m)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로비텔 호수에 당일로 다녀오는 가벼운 차림의 트레커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삼거리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한 시간 더 쉼 없이 오르면 로비텔 호수에 닿는다. 호숫가 풀밭에는 캠핑을 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 에크랑 산군이 프랑스 최고의 국립공원이지만 자유롭게 캠핑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무조건 규제하기보다는 이용자 스스로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의 일환이 아닐까.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들에 에워싸인 로비텔 호수를 보며 잠시 쉬어간다.

프랑스 정부가 1992년부터 10년 동안 에크랑 국립공원의 알파인 호수들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에크랑 산군에 흩어져 있는 60개 정도의 호수들 가운데 이 로비텔 호수가 가장 크고 깊다고 한다. 곧 넘을 발롱 고개에서 발원한 이 호수는 제법 큰 35㏊에 깊이가 70m나 되고, 퇴석 지대에 위치해 있어 급격한 수위 변화에도 호수는 유지된다. 여름에 수위가 가장 높고 겨울에 최저가 되는데, 산소가 풍부한 차가운 호수에 물고기도 산다. 곤들메기와 송어, 피라미 등이다. 낚시는 허가를 받아야 하며 물고기는 계곡 아래 호텔에 팔린다고.

다시 출발이다. 발롱 고개(Col du Vallon, 2,531m)로 이어지는 오르막은 호숫가 좌측 풀밭에서 시작된다. 한동안 호수를 우측 아래에 두고 가파른 사면을 끼고 오른다. 한 시간 정도 오르면 작은 개울가 풀밭이 나타나고 전망이 트인다. 발롱 고개 주변에서는 물을 구할 수 없기에 여기서 마지막으로 물을 떠야 한다. 이제부터 나무는 없고 2,130m 높이의 알파인 지대가 펼쳐져 온갖 야생화들이 반긴다. 삭막하게 느껴지는 돌길을 걸어 호수에서 3시간 걸려 고갯마루에 선다. 반대편에서 오른 트레커들을 만나게 되는데, 땀 흘린 후의 기쁨을 나누며 쉬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새롭게 펼쳐진 에크랑 산군의 파노라마를 눈앞에 두고 커피를 마시는 여유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다.

고개 너머 동쪽 사면은 넓은 풀밭에 지그재그로 길이 나 있다. 뮈젤 호수(Lac de la Muzelle, 2,105m)가 한참 아래에 내려다보이며 호숫가에 위치한 뮈젤 산장(2,130m)도 자그마하게 보인다. 고갯마루에서 한동안 가파른 흙길을 걸어 경사가 완만해질 무렵 돌밭지대를 건너면 뮈젤 호수다. 고개에서 한 시간 걸린다. 호숫가를 따라 남향의 따뜻한 산비탈에 안락하게 지어진 뮈젤 산장으로 향한다. 나무로 지은 산장 발코니에서 호수와 주변 산들을 지켜보며 발롱 고개를 넘은 피로를 푼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산장에서 하룻밤 묵어가면 좋다. 부르 다뤼드로 내려가는 하산은 산장 뒤편 언덕을 넘어 곧장 개울을 끼고 걸어서 내려가면 된다.

한편 산장 아래 수정처럼 맑은 뮈젤 호수는 2,000m가 넘는 지대에 있어 기온이 낮고 일조량이 부족한 척박한 환경 때문에 생물들이 번식하기 어려운 생태계의 유전자들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외부의 유기체인 플랑크톤이 서식하게 됨으로써 보석처럼 맑던 호수도 그 빛을 잃어간다고 한다. 산을 사랑하는 이로서의 책임감뿐 아니라 자연보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Tip=7~9월 중순 최적…2000m 고개 넘나드는 일주일 코스도 있어

◇산행정보:고스와르나 당쉐르에서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하면 발롱 고개를 넘어 하루 만에 부르 다뤼드로 충분히 하산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 여유를 가지고 뮈젤 산장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좋다. 1960년대에 지어진 이 멋진 통나무 산장은 6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문을 여는데, 70개의 침상이 구비되어 있으며 각종 음료수 및 음식을 제공한다. 전화(04 76 79 02 01)로 예약하면 좋고 석식 및 아침식사를 포함한 1박 요금은 44유로이다.

에크랑 산군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도시로는 그르노블이 가장 큰데, 그르노블 공항에서 버스로 30분이면 기차역 옆의 버스터미널에 닿을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제네바나 샤모니, 파리 등에서 그르노블까지 가면 되고 그르노블에서 에크랑 산군의 관문인 부르드와장까지 버스로 한 시간 걸린다. 부르드와장에서 각 마을까지는 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에크랑 산군을 한 바퀴 도는 180㎞ 길이의 일주코스도 있는데 2,000m 이상의 고개들을 일주일 이상 넘나들면서 프랑스 최고의 국립공원을 트레킹할 수 있다.

의사소통은 영어만으로도 불편이 없으며 일부 산장에서는 카드 사용도 가능하지만 유로를 현금으로 지니고 다니는 게 편리하다. 산행은 7월부터 9월 중순까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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