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은 길재, 구미에 은거 세상을 비추다] (6) 길재와 구미'선산의 영남 사림학맥

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 '길재 성리학'

금오서원의 중심 건물인 정학당.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옆에 측실을 꾸몄다. 굵직굵직한 두리기둥과 시원한 대청이 눈길을 끈다.
금오서원의 중심 건물인 정학당.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옆에 측실을 꾸몄다. 굵직굵직한 두리기둥과 시원한 대청이 눈길을 끈다.
금오서원 내에 길재와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다섯 명의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상현묘(尙賢廟).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금오서원 내에 길재와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다섯 명의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상현묘(尙賢廟).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금오서원의 중심 건물인 정학당에 걸려 있는 편액들, 대청 안쪽 벽에 붙은
금오서원의 중심 건물인 정학당에 걸려 있는 편액들, 대청 안쪽 벽에 붙은 '칠조'(七條)란 제목의 현판에는 낙서를 하거나, 책을 망가뜨리거나, 공부를 안 하는 등 일곱 가지 규정을 어기면 돌아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경북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지주중류비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인 지주중류비는 1587년(선조 20년)에 인동현감 류운룡이 야은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비석 표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의 글씨인
경북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지주중류비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인 지주중류비는 1587년(선조 20년)에 인동현감 류운룡이 야은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비석 표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의 글씨인 '지주중류'(砥柱中流) 네 글자를 새겼고, 뒤편에는 서애 류성룡이 '지주중류'의 뜻과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길재가 낙향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12세 된 소년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길재는 애초에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며 홀로 학문에 정진하려 했으나 인근 고을에서 글을 배우려는 아이들과 성리학을 논하고자 하는 선비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던 터였고 그 소년도 그들 중 하나였다. 선산이 고향인 소년의 이름은 김숙자(金叔滋)였으며 길재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익혔다. 길재가 어릴 때처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강했던 강호(江湖) 김숙자(1389~1456)는 나중에 뛰어난 학자가 되면서 16세기 이후 정몽주와 길재로부터 비롯된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학문을 전수받으면서 영남 사림학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계보를 이었다. 12세의 김숙자가 찾아왔을 때 길재는 48세였으니, 김숙자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제자였다. 김숙자는 1414년(태종 1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5년 후인 세종 1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고령현감, 개령현감, 사예(司藝) 등의 벼슬을 거쳤고 1456년 사직한 뒤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 그해에 죽었다.

김숙자는 스승인 길재의 학문과 가치관을 물려받아 소학의 법도를 따라 어버이를 모셨고 학문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선비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일반화되었으며 조선 선비들 사이에 모범적으로 삼아야 할 학문 자세와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김숙자는 남을 가르치는 데에도 힘써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리고 나서 가르치기까지 해 배우는 사람들이 큰 감동을 하기도 했다. 길재의 애제자로 스승의 행장을 기록으로 남긴 박서생(朴瑞生)이란 인물도 있다. 생몰년이 불확실한 박서생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때 배운 수차의 사용을 건의, 농사 관개를 혁신하는 데에 앞장섰다. 대사성, 집현전 부제학, 공조'병조의 참의 등을 지냈으며 '야은언행록'을 남겼다.

성리학(性理學)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 중국 송나라 때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깊이 사색함으로써 성립된 학문이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이를 집대성하여 철학 체계를 세운 것으로, 일명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이전에는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 등이 단순한 도덕사상을 강조한 데서 시작해 한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훈고학으로 발전했다. 명나라 때에는 왕양명이 '천리'와 '이치'보다 인간의 마음을 중시하는 연구에 나서 양명학, 심학(心學)이 성행했다.

◆인재들이 구미'선산으로 모여들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수행해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면서 도입됐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은 가족 중심의 혈연 공동체와 국가 중심의 사회 공동체 윤리 규범인 충효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했고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조선 왕조를 거부했던 길재는 정몽주와 함께 오히려 대표적인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성리학은 주로 사회적 인간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측면에서 사상을 심화시켰고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에 나섬으로써 도교나 불교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길재가 관혼상제를 불교식이 아니라 주자가례에 따라 엄격히 시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인간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인 천리(天理)를 부여받았다고 보아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추구하고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안향, 백이정, 이제현 등을 거쳐 이색, 정몽주, 권근, 길재, 정도전 등에 의해 계승됐다. 그중 길재와 김숙자-김종직 부자가 정몽주의 정통 성리학을 이어받으면서 학풍이 크게 진작돼 이들은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는 중심인물이 됐고, 구미'선산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배경을 살펴보면 사림파 형성 초기인 고려 말에 선산, 성주 등지의 사족들이 관료로 많이 진출하면서 재경 관인들이나 다른 지역 출신의 사족들이 대거 선산 지방으로 모여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길재, 김숙자, 이맹전, 김맹성 등 성리학자들, 그리고 왕조 교체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파와 나중에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는 사류들도 선산으로 찾아들었다. 선산이 땅이 기름져 농업 생산성이 높은데다가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높아 토지를 소유한 사족들이 운집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학문적 기반을 갖춘 것도 영남 사림파의 근거지가 되는 데 한몫했다. 이처럼 구미'선산을 성리학의 중심지로 간주하면서 '영남 인재의 반이 일선(一善:선산)에서 났다'는 말이 유행하게 됐다.

성리학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동서분당(東西分黨),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열되었다. 이 무렵 성리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면서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벌어지는 등 심오한 철학적 사상으로 크게 발전했다. 영남학파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에 의해 형성된 학통을 말한다. 영남학파는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됐다. 이황과 조식은 을사사화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동서 분당 이전에 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종직, 김굉필 등이 개혁 정치를 펴려다 희생당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파는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는 데에 큰 물줄기를 공급했다. 이들 네 명은 모두 구미'선산 출신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더욱 심오하게 발전하는 자양분이 됐으니 구미'선산 지역이 조선시대 성리학의 근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김종직(1431~1492)은 외가가 있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도승지,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낸 출중한 관료이자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난 대학자였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문하생인 김굉필'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 등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키면서 정치와 사상의 중심으로 이끌어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자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 일컬어진다.

김종직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도학정치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이 때문에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전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그의 사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사관인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적어 넣었다. 훈구파가 이를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이 부관참시당하고 김일손 등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나중에 중종이 즉위하여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굉필(1454~1504)은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고 주부(主簿),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임지에 와 있던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가르쳤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 신원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조광조(1482~1519)는 훈구파를 견제하고 개혁 정치를 펴려는 중종에 의해 발탁되었다. 사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사림의 영수'로 주목받던 조광조는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주장하여 사림 28명을 선발했으며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훈구파와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빚었으며 결국 훈구파의 모략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능주로 귀양가 한 달 만에 사사되었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 htd7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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