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보복 정치의 끝은?

"같은 여자인 것이 부끄럽네요." 이틀 전 대구에서 점심을 함께한 40대 중반 직장 여성의 말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고 귀를 세운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성의 장점은 포용력과 자애로움인데 그것이 없다면 욕먹을 만하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한 말이었다. 유승민 의원 부친상에 조화를 보내지 않은 데 대한 그분의 소견이었다.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여성의 말씀이었던 만큼 그저 무심하게 넘어가려 했다. 조화 하나 보내지 않은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일까 싶기도 했다.

그날 저녁 포항의 친목 모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50대 후반 여성과 자리를 함께했는데 비슷한 얘기가 또다시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을 숭배해 온 열성 지지자인 이분은 단 한 번도 박 대통령에게 실망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부모를 그렇게 아프게 보내드렸지 않았나. 적대적인 사이라고는 하지만, 나라의 큰 어른답지 않게 처신한 것 같아 정말 실망했어요."

이쯤 되니 이번 일을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대구의 평균적인 노인층인 아버지,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주위 노인들이 유승민 의원은 옛날 같으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갔을 텐데 조화를 보내지 않은 걸 당연하게 여긴다. 대통령이 실수했다고 하는 이도 일부 있긴 하더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여자라서 그렇다"며 여운 있는 말씀을 해주셨다.

세월호 참사나 교과서 국정화 문제 같은 논리적 이성적 이슈에도 전혀 흔들림 없던, 철옹성 같은 핵심 지지층이 이런 감성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열띤 논박을 벌이고 있음을 보게 됐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해프닝 같은 사안에 대해 열성 지지층마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다. 상사(喪事)를 중시하는 한국인 특유의 감성을 건드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과 관련한 며칠간의 신문'방송의 보도 태도를 한번 돌아보자. 직설적인 표현은 쓰고 있지 않지만, 그 저변에는 '편협하고 협량한 대통령'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보수적인 논객들마저 세상사와 무관한 구름 위에 있는 여성, 가정을 꾸려본 적이 없는 '시근없는' 여성이라는 뉘앙스를 은근슬쩍 섞어 놓았다. 솔직하지 않게, 에둘러 말하는 그 비겁한 행태에도 화가 난다.

일부의 시각이라고 낮춰 보더라도 '결단력 있고 추진력 있는 지도자'가 졸지에 '속 좁은 여성'으로 비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민 정서에 악영향을 주는 일이다. 대통령이 이처럼 별것 아닌 일에 상처받고 비판받는 것은 대통령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특정인을 미워하고 끝까지 보복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뉴스거리도 아니고, 쓸데없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구경북 사람, 나아가 핵심 지지층이 느끼는 박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의 무게감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신경 쓸 것이 무엇인가.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 시절 주가를 높였고 차세대 이미지를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대구경북에서만큼은 대선에 세 번 실패한 비서실장 내지 참모의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분이 아니던가.

사사건건 대들고, 끝까지 머리를 치켜들고, 과거 은혜는 망각하고 자신만 앞세우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밉상일 수밖에 없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식들도 대개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밉상을 뭉개버리겠다면 정말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다. '미운 놈'의 편을 들었다고 해서 모두 바꿔 버리겠다고 하는 것도 더더욱 웃기는 일이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고 공허함뿐이다.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은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보복 정치가 결국에는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음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모름지기 나라의 '큰 어른'이라면 절대 삼가야 할 일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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