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힐링토크] 아픈 과거사 공유한 베트남과 '다리 잇기' 구수정 아맙 본부장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베트남' 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캐슈넛 농사를 짓고 있는 베트남 농부들
캐슈넛 농사를 짓고 있는 베트남 농부들

1993년 만 스물일곱, 그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난다. 어머니는 단식까지 하며 만류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베트남에서의 첫날밤, 그는 무더운 열기 속에서 운명의 끌림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호찌민대 역사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1999년,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국내에 전하면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후 1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베트남에 머물면서 전쟁의 피해자를 도우며 한국과 베트남의 민간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2011년에는 지인들과 함께 한국 베트남 간의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위한 기업 '아맙'(AMAP)을 설립했고, 최근에는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구수정(49) 아맙 본부장을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만났다.

-한국에는 자주 오나.

▶1년에 한 차례 정도 온다. 겨울에는 추워서 잘 오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 다 된 모양이다.(웃음) 최근에는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을 준비하느라 자주 오고 있다.

-역사교과서 때문에 광화문이 어수선하다. 역사전공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베트남도 최근에 유엔의 권고안으로 국정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바꾸고 있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로 묻겠다. 베트남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인생의 물꼬를 바꿔놓은 나라다. 베트남은 내 인생의 내용과 방향을 송두리째 틀어버린 추(錘)다.

-어떻게 베트남에 유학하게 됐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베트남은 가기 힘든 나라였는데.

▶나는 문학소녀였다. 베트남을 소재로 한 '사이공의 흰옷' '불꽃처럼 살리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이 가슴에 들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일을 해보았으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나라가 베트남이었다. 운명 같은 끌림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에 유학을 가는 사람은 있었으나 베트남 유학생은 거의 없었다.

-주위의 반대가 심했겠다.

▶어머니는 '거기는 아직도 전쟁 중인 나라가 아니냐'며 단식까지 하면서 말렸다. 그런데 고집을 부렸다. 가이드북이나 정보 하나 없는 베트남을 향해 1993년 무작정 떠났다.

-겁이 없는 성격인 모양이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울보다. 그것이 싫어 일단 저질러 놓고 본다. 베트남 유학도 반대하니까 더 고집을 피운 것이다. 그래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하면 엉덩이는 무거운 편이다.

-베트남의 첫인상은 어땠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데 숨이 막혔다. 지열이 올라와 무더운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호찌민 공항에는 택시도 대중교통도 보이지 않았다. 자가용 같은 차가 있었는데 종이에 '택시'라고 써 붙여져 있었다. 막무가내로 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베트남의 생활이 시작됐다.

-적응은 쉬웠나.

▶베트남에 대한 기대는 도착하자마자 무너졌다. 에워싸고 구걸하는 통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1년 정도 방황했다. 차차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눈에 들어왔다.

-왜 베트남전쟁(1960~1975)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1997년에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에 관한 논물을 쓰려고 백방으로 자료를 찾다가 하노이 외무부 국가문서보관센터에서 어렵사리 문건 하나를 입수했다. 제목이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었는데 여러 번 복사를 했는지 판독도 어려운 문건이었다.

-그 내용을 보고 진실이라고 믿었나.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일 년쯤 묵혀두고 있었는데 1998년 일본의 피스보트를 타고 한국군 학살지역을 둘러보게 된 이들을 만나면서 믿기진 않지만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확인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90년대 말, 베트남의 상황은 자료에 적힌 지명을 찾기조차 힘들만큼 지도도 없었고 길도 없었다. 봉고차를 한 대 빌려 문헌에 나온 옛 지명을 찾아 탐사를 시작했다. 45일간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혼자서 하루 세 마을 이상 강행군을 했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 외국인이 나타나 인터뷰를 하고 다니니까 공안에 잡히기도 했고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기를 수차례 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전쟁 후 30년 만에 한국 사람이 나타나서 학살에 대해 묻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마을에는 100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이 일제히 손을 들고 '카이' '카이'했다. 카이는 '진술한다'는 뜻인데 좀 더 공식적인 의미가 있다. 수십 년간 묻어두었던 피맺힌 사연들이 터져 나왔다.

-듣는 것조차 힘들었겠다.

▶매일매일 그들의 증언을 듣고 또 들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는 거의 같았다. 연발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서 죽였다. 가족이 몇 명 죽었다는 것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에 품은 한이 풀리는 듯했다.

-그 당시 가져간 인삼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고 들었다. 이유가 궁금하다.

▶탐사를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아주 싼 인삼차를 가지고 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을에 나누어 주었더니 인삼차가 만병통치약이 되어 버렸다. 머리가 아파도 그것을 타서 바르고 배가 아파도 그것을 발랐다. 이유를 알아본즉 그들이 수십 년 간직했던 한을 풀어놓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고 두통이 사라졌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인삼차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 같았다. 나중에 더 비싼 인삼차를 가지고 갔었으나 효능이 없었다. 아마 그들의 한이 일정 부분 풀리면서 치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증언을 들으러 다니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있다면.

▶길 위를 걷는 군장을 한 20대 한국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 이 지옥 같은 더위의 길을 걸어갔던 그들의 어려움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것도 30년 전에…더 열악했을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베트남은 그늘이 없으면 단 3분이라도 걷기 힘든 곳이다.

-'베트남 사람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왜 스스로 들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있다. 그 위안부 문제도 일본의 지식인이 먼저 제기한 것이다.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이 더 이상 베트남전쟁의 뒷이야기를 감추려 한다면 양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 '아맙'을 만들었나.

▶2011년 지인들과 함께 한국과 베트남 간의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위한 기업 '아맙'을 설립했다.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활동을 하며 공정여행과 그들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아맙은 무슨 뜻인가.

▶아맙은 베트남 민속악기다. 아맙나무 대롱을 잘라 양쪽에서 두 사람이 서로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을 맞춰야 비로소 소리가 난다. 베트남은 우리가 외면했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마주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함께 만들어 할 파트너다.

-20년 가까이 그 일에 매달리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무병이라도 앓듯 몸이 아팠다. 이야기를 하는 그들도 아팠고 그것을 받아내는 나도 아팠다. 이제는 과거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부터 20년쯤 흘러서 그때 우리가 했던 이런 노력이 지속된다면 후대들에게 덜 부끄럽고 덜 미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을 만들려는 것도 미래세대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미래지향적인 평화담론을 만들어 가고 싶다. 이곳을 통해 미래세대의 활동가를 양성하고 거기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을 했으면 한다. 베트남도 변화하고 있어 단체들의 개별적인 행동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도 이유다.

-한국과 베트남은 아픈 과거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과 한국인의 다른 점이 있다면.

▶베트남 사람은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다. 만약에 길거리에서 한국 사람이 지나가면 '넘버원'이라고 엄지를 치켜든다. 미국인이 지나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여자'이기에 이 일이 더 힘들지 않았나.

▶당신이 남자였다면 '뼈도 못 추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자라면 이런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베트남에 길을 닦아준 한국기업도 있었는데, 그들 역시 곳곳에 세워진 민간인 학살위령비를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역사문제가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나.

▶오랫동안 나 자신을 많이 괴롭혀온 질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해결이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역사문제에 해결이 있겠는가?

-나이 50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한 달이라도 나 자신에게 '안식월'을 주고 싶다. 온전한 쉼을 갖고 싶다.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정지된 상태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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